“농업에 희망 없다” 보름째 이어지는 농민봉기 … 수도까지 마비된 프랑스

남부지역 최초 도로봉쇄 이후 걷잡을 수 없이 퍼져
프랑스 정부 달래기에도 농민들 “확실한 답 원해”

  • 입력 2024.02.01 19:11
  • 수정 2024.02.04 18:22
  • 기자명 한우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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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한우준 기자]

파리 렁지스 농산물 도매시장을 향해 전진하고 있는 프랑스 남부 옥시타니 지역 농민들의 트랙터. Rural Coordination X(트위터) 갈무리
파리 렁지스 농산물 도매시장을 향해 전진하고 있는 프랑스 남부 옥시타니 지역 농민들의 트랙터. Rural Coordination X(트위터) 갈무리

규모와 기술 모두에 있어 선진적 수준의 농업을 자랑해왔던 프랑스에서 전국 규모의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생산물가 급등, 각종 절차와 규제의 심화, 불공정한 유통구조, 농가부채 그리고 개방농정까지 농업소득을 떨어뜨리는 모든 요소들이 최근 몇 년간 누적된 결과다. 농민들은 ‘더 이상 농업에 희망이 없다’며 지역과 진영을 가리지 않고 국가기능 마비까지 초래하는 무력시위에 뛰어들었고, 이 같은 물결은 프랑스를 넘어 유럽 전역으로 확산하고 있다.

최근 몇 달 새 프랑스 곳곳에선 생산비 증가, 농가부채, 무분별한 수입, 정부의 지나친 환경규제 등이 농촌과 농민의 생존권을 짓밟고 있다며 정부 농정을 규탄하는 시위와 집회가 줄을 잇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와중 지난달 18일, 프랑스 내에서도 유기농업으로 유명한 최남부의 레지옹 ‘옥시타니’에서 첫 봉쇄 행동이 일어났다.

이 시위는 툴루즈 지역을 품은 ‘오트가론’주의 한 축산농민 제롬 베일의 주도로 진행됐다. 그와 동료 농민들은 오트가론을 관통해 툴루즈와 스페인을 잇는 A64 고속도로를 수많은 트랙터와 짚더미로 막아버렸다. 농민들은 현장에 급수시설과 화장실까지 설치하는 등 절대 물러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옥시타니 농민들의 봉쇄를 시발점으로 ‘농민봉기’가 그야말로 전국으로 확산됐다. 이미 각지에서 소속 지역조직들이 자발적 행동에 나서는 것을 지켜보던 주요 농민단체들도 공식적인 ‘총동원령’을 통해 이번 운동이 전국구급 규모임을 확실히 했다. 프랑스 제1의 종합농민단체 FNSEA, 우파 성향의 Coordination Rural에 이어 25일에는 현지에서 소위 ‘제3노조’라 일컫는 진보 성향의 Confédération Paysanne까지 전국 회원들의 동참을 촉구했다.

이에 스트라스부르·렌·낭트·리옹 등 지역 주요 대도시들이 똑같은 상황을 겪기 시작했으며 26일 새벽부터는 FNSEA의 일드프랑스(파리를 포함한 프랑스 중북부 지역) 지부에 의해 수도 파리도 봉쇄당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봉쇄에 참여한 농민 수는 FNSEA가 발표한 수만 해도 7만2,000명 이상에 달했다.

공무원들까지 현장에 나와 농민들을 지지하고 농업의 가치를 역설하는 등 사회적 지지도 등에 업은 상황에서, 농민들은 이제 칼끝을 지역에서 수도로 돌렸다. 파리 각지에서 봉쇄가 이어지는 가운데 27일에는 Coordination Rural의 한 옥시타니 지역지부가 농업의 가치를 상기시키겠다며 파리 렁지스 농산물 도매시장 무력화를 위한 여정을 개시했는데 이것이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유럽 최초의 신선 농산물 도매시장이기도 한 렁지스 도매시장은 서울 가락시장의 약 4배 규모 부지에서 매년 300만톤의 농수산물을 중개하는 프랑스 최대의 도매시장이다.

중부지방의 리모주·오를레앙을 거쳐 파리까지 700km에 이르는 여정에 합류한 트랙터는 300여대까지 늘어난 상황으로, 2월 1일 현재에도 치안당국의 감시와 방해 속에 상경이 계속되고 있다. 그간 각지 농민들의 봉쇄 행위를 지켜본 프랑스 치안당국도 렁지스의 피해만큼은 막겠다는 입장이어서 산발적 충돌과 연행이 계속되고 있다.

지난달 26일 오후 가브리엘 아탈 프랑스 총리가 시위의 도화선이 됐던 오트가론의 한 농장 앞에서 10가지의 즉각적 후속조치를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프랑스 정부는 계속해서 농민들을 설득하고 협상을 진행하고 있지만 세 농민단체 모두 정부의 발표내용이 충분치 않다며 행동을 계속하겠단 입장을 냈다.

프랑스 정부는 면세경유의 면세 종료 철회방침 및 각종 신고·허가 등의 규제를 간소화하겠다고 공언하는 한편 △4%의 휴경지를 유지해야만 보조금을 지급하는 공동농업정책(CAP)의 수정과 △관세가 면제된 우크라이나산 농산물 등 불공정 경쟁 농산물의 수입 제한을 EU에 요청할 예정이라며 농민들을 설득했다. 또한 농산물 구매가격 투명성을 제고하기 위해 제정된 ‘에갈림법(Egalim Law)’의 집행을 확고히 하고 이를 존중하지 않는 가공업체·유통업체로부터 거둬들인 모든 벌금을 농민의 재정적 지원에 사용하겠다고 강조했다.

여기에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과 부처장관들은 EU-메르코수르(남미 4개국) 자유무역협정(FTA)에 강력한 반대 의사까지 표하며 농민 달래기에 나섰다. “프랑스는 원하는 것을 유럽에 강요할 만한 충분한 힘이 있다(브루노 르메르 경제장관)”, “프랑스와 유럽 생산자들이 불공정 경쟁을 피할 수 없는 한 메르코수르와의 협상은 있을 수 없다(마르크 페노 농무부 장관)” 등 강경한 발언이 잇따랐다.

의무휴경 폐지와 불공정경쟁 농산물 수입제한, 메르코수르 FTA 폐기 모두 핵심 요구사항에 속하지만 농민들은 보다 확고한 정부의 대답을 기다리며 봉쇄행동을 이어가고 있다. FNSEA의 부회장 뤽 스메세르는 ‘프랑스앵포’와의 인터뷰에서 “농무부 장관은 우리를 위해 싸울 것이며 이번 CAP가 끝나는 2027년까지 우리가 휴경할 필요가 없도록 모든 것을 할 것이라고 `지금 바로' 말해야 한다”라고 요구했다.

프랑스의 대형마트 르끌레르(e.Leclerc)의 물류센터를 가로막고 있는 Confédération Paysanne 소속 농민들의 트랙터. Confédération Paysanne 페이스북 갈무리
프랑스의 대형마트 르끌레르(e.Leclerc)의 물류센터를 가로막고 있는 Confédération Paysanne 소속 농민들의 트랙터. Confédération Paysanne 페이스북 갈무리

한편 탄소중립적 생태농업을 지향하는 Confédération Paysanne는 다른 농민단체들과 마찬가지로 행동에 참여하면서도 휴경 폐지나 농약 규제 등 기후위기가 야기한 조치를 폐지하는 것에는 반대하고 있다. 이들은 과수·채소 농업의 쇠퇴를 불러온 FTA 체제의 포기 및 유통기업들이 원가 이하로 농산물을 구매하는 것을 막는 법안 제정 두 가지 요구에 집중하는 한편, 우익 정치인과 농민단체들이 기후위기를 부정하고 이주노동자를 비난하는 데 이번 사태를 이용하는 모습을 우려하기도 했다. Confédération Paysanne는 정부가 농민들이 생산한 농산물을 원가 이하로 판매하지 않도록 보장하는 어떤 발표도 하지 않았다며 현재 유통기업의 물류센터를 봉쇄하고 대형마트를 점거하는 캠페인을 벌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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