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때문에 과거를 망쳤구나”

  • 입력 2024.01.28 20:20
  • 기자명 이광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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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호는 대거리하는 기범이를 만류하며 소매를 잡아당겼다. 그러나 양반가의 자제를 호종해온 사노와 선접군이 소매를 걷고 일어나더니,

“오냐, 이놈아. 오늘 한양 맛 좀 보아라.”

하는데 병호가 나서서 허리를 숙였다.

“미안하게 됐습니다. 대신 사과할 테니 시험이나 무탈하게 치릅시다.”

“겁은 되우 나는 모양일세.”

텁석부리가 사람을 아래위로 훑고는,

“내 그쪽은 봐줄 테니 비키시오.”

하면서 병호의 어깨를 떠밀었다. 그러나 쇠말뚝처럼 꿈쩍 않고 버티자 무뢰배의 눈이 꼿꼿해졌고 지켜보던 기범이가 다짜고짜 면상을 콱 박아버렸다. 기범이의 갓이 우그러지면서 상대가 코를 싸쥐고 넘어질 적에 내닫는 패랭이를 이번에는 병호가 밭다리로 퉁겼다. 상대가 어떤 선비의 시지에 벌러덩 나자빠지고 사람들이 솔개 만난 병아리처럼 흩어질 즈음 상대편 차일과 이웃 차일에서 무뢰배들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차일마다 대여섯은 되는 눈치여서 병호와 기범이가 아무리 목검과 봉을 휘둘러봤다 하나 중과부적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동원된 무릎치기와 더그레 자락까지 몰려들어 두 사람은 꼼짝없이 에워싸일 판인데,

“과장에 파락호가 웬 말이냐? 이곳이 정녕 나라의 인재를 뽑는 자리냐?”

하는 소리가 나고 흙부스러기가 날아들었다. 언감생심 선접군은 꿈도 못 꾼 채 뒤편에 끼어 앉은 향촌 선비들이 사태를 주시하다 말고 두 사람을 두둔해 나선 것이었다. 소란이 커지자 대갓집 차일에 남은 무뢰배들이 병장기를 챙겨 앞 대오에 합류하였다. 모시고 온 도련님을 지킨답시고 그렇게 나오자 매어둔 줄이 끓어진 것처럼 술렁임이 번지더니 연이어 흙부스러기가 날아왔다. 멍석 아래가 밭이라 돌 대신 흙덩이를 던지는 모양이었다. 그러자 앞쪽의 무리도 흙과 돌로 맞대응을 해와 과장은 대보름 투석전처럼 되어가는 형세였다.

의분은 있으나 일에 말려들기 싫은 선비들은 옆으로 비켜나고 강단 있는 축들이 과장 뒤에 무리를 이루었다. 그에 맞서 역졸이 대오를 정비했고 대갓집 자제들이 뒤에 은신하자 과장은 도끼로 쪼갠 듯 양분되는 양상이었다. 거벽 사수도 없이 혈혈단신 입장한 선비들은 바닥에 깔린 멍석을 걷고 흙덩이뿐 아니라 돌멩이를 꺼내 역졸 진영에 날렸다. 그들에 맞서 밖에서 들어온 역졸이 저편에 가세하는데 저마다 등패를 들고 있었다. 선비들이 던지는 흙더미를 등패로 막고 뒷열에서 육모방망이와 당파를 든 자들이 오와 열을 이루자 수가 많아도 이쪽은 오합지졸이라 밀리지 않을 수 없었다. 열세를 느낀 선비들은 등패를 든 역졸이 접근하지 못하게 흙덩이 돌멩이에 벼루까지 날리게 되어 먹물이 사람들 옷자락을 적셨다.

이쪽의 벼루에 맞서 역졸 뒤에서도 큼직한 돌멩이가 날아와 막을 것이 변변치 않은 선비 중에는 이마가 깨지고 가슴을 쥐어 잡는 자가 속출하였다. 대오 한쪽이 무디어지자 등패를 든 역졸이 오와 열을 맞춰 발로 바닥을 치며 접근했고, 병졸들이 등패 너머로 창대를 밀며 압박해왔다. 처음에는 호기로웠으나 자꾸 부상자가 나오고 대오를 끄는 장두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어서 선비들은 점점 구석에 우그러들었다. 이제는 살길을 도모해야 할 형편이지만 사방이 가시울타리라 나갈 곳은 출입문뿐인데 역졸이 버티고 있어 몰이꾼에 쫓기는 토끼 신세였다. 힘으로도 당할 수 없으려니와 이것은 나라의 대사에 반기를 든 형국이라 두려움마저 역병처럼 번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수세에 몰린 선비 몇 사람이 멍석을 가시울타리에 걸고 위를 타넘었다. 싸움에 참여하지 않고 방관하던 선비들도 멍석을 여기저기 걸쳐두므로 사람들은 요령껏 과장을 탈출하였다.

“저 이는 무안에서 온 선비가 아닌가?”

밖에 나온 기범이가 역졸에게 팔을 잡혀 끌려가는 선비를 보고 외쳤다. 그러더니 달리는 기세 그대로 나졸의 등짝을 질렀고, 그자가 휘청이는 사이 무안 선비가 다른 나졸의 팔을 비틀어 몸을 뺐다.

“언제 기회가 되거든 또 뵈입시다.”

향교가 있는 마을을 빠져나와 무안 선비는 영광으로 난 길로 빠졌고 기범이와 병호는 고창 방면으로 북상하였다. 무안 사내와 갈라선 두 사람이 경내를 벗어나 한갓진 곳에 이르렀을 때 기범이가 물었다.

“화났니?”

“아니.”

그러나 병호는 어쩐지 시무룩하였다.

“어쨌거나 나 때문에 과거를 망쳤구나.”

“과장이 저 지경이면 채점인들 제대로 하겠어? 상피(相避)고 나발이고 저희끼리 다 해먹겠단 수작이라구. 아무리 훌륭한 책문을 써도 우리 차례는 오지 않아.”

두 갈래 길에서 흥덕 쪽을 고르며 기범이가 중얼거렸다.

“조선의 향국 년수가 다 했다더니 『정감록』이 맞는 모양이다.”

그 사이 봄은 완연해 길가에 매화가 피고 산기슭에도 진달래가 붉었다. 나무도 풀도 자라지 않는 흰닭고개에 올라선 병호가 고갯마루 가녘으로 비칠비칠 걸어갔다. 낭떠러지 위에 쭈그려 앉은 그의 어깨가 조금 있자 들썩거렸다.

“어으흐흐흑…… 어으흐흐흐흥……!”

난리판에서도 놓지 않고 챙겨온 곰방대에 기범이가 연초를 재웠다. 그가 한 죽을 태우고 울음을 그친 병호에게 말하였다.

“돈냥이 남았거든 술이나 마시자.”

“찌그러진 갓을 보니 넌 선비도 무엇도 아니구나. 줄포로 가자.”

그들은 고개를 내려와 구부러진 길을 걸어갔다.

 

식사를 마친 병호는 상을 들어 부엌에 내가고 기범이는 아랫집으로 내려갔으니 연초를 태울 모양이었다. 갑자기 백구가 자지러지게 짖어 부엌을 나서며 보니 전립 쓰고 쾌자를 걸친 장교가 나장 예닐곱을 끌고 들어섰다. 병호와 눈이 마주친 동달이 차림이 물었다.

“그대가 전병호인가?”

“그렇습니다.”

“태인 관아에서 나왔다. 순순히 따를 텐가 오라를 받을 텐가.”

병호는 이 사태가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한 달 전 무장에서 치러진 향시는 소요사태가 종결된 후 재개되었다는 소문이지만 호구장적과 시지 제출자의 명단을 대조해 명단에 없는 자를 추려내려는 것이었다.

“연로하신 할머니가 계십니다. 옷 갈아입고 나오겠습니다.”

병호는 횃대에 걸린 창의를 내려 입고 안방으로 건너갔다.

“관아에서 보자 하니 다녀오겠습니다. 아버님 돌아오시거든 그리 전해주십시오.”

장씨도 사태를 파악하였다.

“이것은 대역죄를 범한 것이 아니다. 지혜롭게 처신하도록 해라.”

그가 장씨에게 큰절을 올리고 밖에 나서자 백구가 나장의 옷자락을 물고 흔들었다. 골목에는 아랫집 기범이가 나장의 인도를 받아 미리 나와 있었다. 다행히 오라는 지우지 않았으나 장교와 나장에 싸여 이동하는 모습이라 들일하던 사람들이 큰일 난 줄 알고 논둑에 몰려나왔다. 거산면 거쳐 태인 관아에 끌려온 두 사람은 호패를 차압당하고 폭우에 무너진 군옥 대신 사령청 옆 구류간에 투옥되었다.

구류간에는 살인 같은 죄를 범한 자는 없었고 결세전(結稅錢)을 착복한 자와 산송(山訟)에 얽힌 자가 수감돼 있었다. 산송으로 들어온 자야 경수(輕囚)로 분류되니 곧 풀려나겠지만 결세전을 착복한 자는 중수(重囚)로 간주되어 칼과 차꼬를 차고 있었다. 구류간에 하옥된 지 얼마 안 돼 군내 나는 꽁보리밥과 소금에 절인 무 두 쪽이 배급되었으나 병호와 기범이는 먼저 온 이들에게 밀어주었다.

미시가 되자 형리가 나타나 네 사람을 세워놓고 얼굴과 몸을 살펴 기록하였다. 어둠이 내리면서 전부터 수감된 두 사람은 쇠약할 대로 쇠약해져 가늘게 코를 골았고 병호나 기범이는 삿자리에 누워 자다 깨기를 반복하였다. 간살을 친 환기구에 갓밝이 기운이 스며들자 다시 보리밥이 배정돼 그들은 뜨는 둥 마는 둥 허기를 면하였다. 입맛이 돌아온 게 아니라 얼마나 수감될지 모르니 몸을 추스를 생각이었다. 전날과 마찬가지로 형리가 나타나 얼굴을 관찰하여 기록하더니 밖에 나가고는 영 꿩 구워먹은 소식이었다.

“매를 치든 말든 빨리 결판이 나면 좋겠구마는.”

기범이가 서성대며 볼멘소리를 할 제 옥문이 열리며 나졸이 불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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