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협법 개정, ‘연임제’ 딜레마에 빠지다

회장 셀프연임 무산됐지만 연임제 자체도 문제 소지 커

법안 폐기하자니 … 연임제 외 나머지 개혁 조항 아까워

‘연임제 조항만 삭제?’ 시기·관례 고려하면 가능성 작아

  • 입력 2024.01.28 18:00
  • 수정 2024.01.28 20:17
  • 기자명 권순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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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권순창 기자]

「농업협동조합법」 개정 작업이 ‘연임제’의 딜레마에 빠졌다. 개정안이 △농협개혁에 필요한 여러 조항들과 △농협개혁에 역행하는 ‘중앙회장 연임제’ 조항을 동시에 담고 있기 때문이다. 통과시키자니 연임제의 문제점이 심각하고, 폐기하자니 나머지 개혁 조항들이 아까운 상황이다.

이 개정안은 농협중앙회장 임기를 단임제에서 연임제로 전환하면서 이를 현직 회장부터 적용하려 해 여론의 따가운 비판을 받아왔다(일명 ‘셀프연임’). 후보자등록일이 지나도록 법안이 통과되지 못함으로써 현직 회장의 연임 도전은 무산됐지만, 아직 연임제 조항은 살아있다. 법안이 이대로 통과된다면 오는 3월 취임할 신임 회장부터 연임제를 적용받게 된다.

셀프연임이라는 중대한 문제에 가려져왔지만, 실은 연임제 자체부터가 논란의 대상이다. 연임제는 역대 농협중앙회장들이 하나같이 비리를 저지르게 만든 원흉으로 꼽힌다. 농협중앙회장 자리엔 이권이 많은 만큼 회장이 본연의 역할보다 연임을 위한 관리·통제활동에 매진할 개연성이 크며, 실제로 과거 연임제 시절 연임에 도전해 낙선한 회장은 한 명도 없고 이들 대부분이 비리로 구속됐다.

현직 회장의 조합장 관리 수단인 ‘조합 무이자자금’을 투명화하는 방안이 이번 개정안에 포함돼 있지만 성과가 의도대로 나올지는 미지수다. 더욱이 무이자자금 역시 여러 문제 중 하나일 뿐이다. 연임제 도입의 선결과제로 △중앙회장의 실질적 인사권 해제 △부가의결권 폐지 △중앙회장 직선제(조합원 투표) 도입 등이 숱하게 제기되고 있지만 이와 관련해선 제대로 된 논의조차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연임저지 비대위가 지난 22일 전국농민회총연맹 사무실에서 농협법 개정안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세 시간에 걸친 격론 끝에, 비대위는 법안 속 ‘연임제’ 조항에 우려를 개진하기로 중의를 모았다. 전국협동조합노동조합 제공
연임저지 비대위가 지난 22일 전국농민회총연맹 사무실에서 농협법 개정안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세 시간에 걸친 격론 끝에, 비대위는 법안 속 ‘연임제’ 조항에 우려를 개진하기로 중의를 모았다. 전국협동조합노동조합 제공

그렇다고 법안 폐기를 논하기도 난감하다. 법안엔 연임제 외에 △도시농협 역할 제고 △비상임조합장 임기 제한(2039년부터 적용) 등 의미 있는 조항들이 다수 들어 있다. ‘개혁법안’이라고 표현하기엔 부족함이 많지만, 그동안 농협개혁과 관련해선 이 정도 수준의 법안조차 형상화된 적이 없다. ‘이성희농협’이 현 회장의 연임을 관철시키고자 ‘제 살 깎아먹는’ 조항을 대거 수용한 결과라는 분석이다. 법안이 폐기되면 차기 국회에선 이만한 논의가 다시 등장하기 어렵다는 게 중론이다.

연임제 조항만 삭제하고 법안을 통과시킬 수는 없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쉽지 않다. 우선 국회도 총선 국면으로 들어서는 시기라 법안 수정에 충분한 시간을 들이기 어렵다. 수정가결이 아니라 원안가결을 밀어붙인다 해도 결과를 낙관할 수 없는 상황이다. 더욱이 법안을 쥐고 있는 건 소관상임위인 농해수위가 아니라 법사위다. 법사위는 소관상임위가 만든 법안에 대해 ‘체계·자구’ 심사권만을 갖는다. 법안의 ‘내용’을 수정한 전례가 없는 건 아니지만, 연임제 조항을 삭제하는 데 부담이 따르는 게 사실이다.

현 시점에 이 법안 관련 가장 많은 의견을 모으고 있는 연임저지 비대위(약칭, 20여 농민·시민·노동단체로 구성)는 법안 폐기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일단 연임제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들은 농협중앙회장 선거일 하루 전인 지난 24일 성명을 내 △농협중앙회장 선거비리 증가 우려 △농협중앙회 내부 민주주의 약화 우려 △단임제 성과점검 미비 등 연임제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비대위는 “새로 선출된 농협중앙회장이 연임의 특혜를 누림으로써 ‘셀프연임’을 막았던 우리의 성과가 왜곡되지 않길 바란다. 우리의 투쟁은 농민조합원 모두를 위한 것이었지 특정인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며 “국회의 현명한 논의를 촉구한다”고 밝혔다.

모든 사람이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는 건 아니다. 농협개혁에 관심을 가져온 야당 관계자들과 지역농협 조합장들 일각에선 “연임제에 문제의 소지는 있지만, 개혁을 위해선 일단 원안가결을 추진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법 폭넓게 개진되고 있다. 셀프연임을 밀어붙이던 세력들이 일제히 손을 뗀 가운데, 셀프연임을 막아낸 세력들만이 저마다 법안에 대한 고민을 이어가고 있는 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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