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장, 도떼기시장이 아닌가”

  • 입력 2024.01.21 18:00
  • 수정 2024.01.21 18:46
  • 기자명 이광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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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범이가 헛웃음을 지었다.

“뭐가 행운이란 말이오? 배가 고프면 탁주나 한잔하고 가시구려.”

“내 말 허투루 듣지 마시오. 나는 혼자가 아니라 사수와 선접군까지 접으로 움직인단 말이오. 거자만도 기천명인데 꼬래비에 앉아보슈. 시제를 읽는 데만 한나절이요, 언덕 같이 쌓이는 게 시지(試紙)인데 뒤에 놓이면 시관(試官)이 읽어나 볼 것 같소? 서울의 대갓집 자제들이 경쟁률 때문에 농토를 연고 삼아 대거 내려왔단 말이우. 그들이 한양의 거벽 사수를 죄 끌고 왔는데 지방 선비들이 어찌 당하겠소.”

“그러면 그런 한양의 거벽 사수를 댁은 당한단 말이우?”

“못 믿으시겠다? 여보슈들, 이리 좀 와보시게!”

사내의 손짓에 목자가 불량한 사람 셋과 사수쯤으로 뵈는 사람이 걸어왔다.

“이 사람들이 나와 접을 이룬 동무들이오. 여기 사수 양반이야 전주서도 명필로 알아줄 뿐 아니라 속필로도 유명합니다. 이삼만이 저리가라 한다니깐. 그리고 여기 이 셋은 시제를 옮겨 적을 적에 밀려드는 사람들을 막아줄게요. 어떠슈?”

“음식을 다 먹었으니 일어나야겠는걸.”

병호가 일어서자 기범이가 따라 나왔다. 동음치면 방면으로 걷던 기범이가 다시 돌아가자 하여 병호는 영문 모르고 따라갔다. 그들에게 수작을 걸던 중년 사내가 다른 선비에게 호객하는데 듣는 이의 표정이 진지하였다. 주막 앞 골목의 깨끗한 집을 골라 기범이는 삽짝을 밀고 들어갔다.

“향시를 보러 온 거자인데 한 칸 비워주고 밥을 대주면 넉넉히 드리리다. 반찬은 상관없고 저녁상에 탁주 한 사발만 올려주면 됩니다.”

그는 가지고 있던 엽전을 몽땅 풀어 마루에 놓았다. 부엌에서 아낙이 득달같이 달려와 엽전을 집어 들었다.

“딸래미가 할머니하고 쓰는 방이 있는데 비울 테니 저녁참에 오실라우?”

“그럽시다.”

두 사람은 도솔암 마애불이 특이하다는 말을 듣고 길을 물었으나 해 안에 돌아오기 어렵다 하여 포기하고 인근을 쏘다녔다.

 

잠을 설친 기범이와 병호는 얼굴에 물도 못 바르고 숙소에서 나왔다. 동이 트기 전이지만 현성의 남문 앞은 사람으로 끓는 중이었다. 시제가 묘시에 걸린다 하여 서두른다고 한 것이 그 지경이라 향교 앞으로 달려가 보니 거기도 솔가리 하나 꽂을 데가 없었다. 답사를 왔을 때만 해도 공터였고 귀퉁이에 밭뙈기가 붙어 있었지만 목책을 치고 탱자 가시를 둘러 그곳은 나라의 행사장다운 위용이 갖춰져 있었다.

오수찰방이 시관으로 임명되었다더니 출입문에는 역졸의 기세가 삼엄하고 과장 앞은 거자뿐 아니라 딸려온 사람들까지 북새통이었다. 먼저 온 인파를 뚫고 새치기로 들어가려는 선접군은 상스런 욕으로 상대를 윽박지르고 한쪽에서는 벌써부터 드잡이에 주먹다짐이 요란하였다. 선접군과 떨어지지 않으려고 새끼를 허리에 연결한 자가 있는가 하면 차일로 보이는 뭉치를 든 자와 기름먹인 우산으로 닥치는 대로 앞사람을 꾹꾹 찔러대는 자도 보였다. 거기에 앞선 자의 오금을 박아 넘어뜨리고 위를 타넘는 자까지 과장은 터지기 직전의 제방 한가지였다.

병호와 기범이는 난생 처음 보는 그 기이한 모습에 어쩔 줄 모르고 인파 바깥을 맴돌았다. 그때 누군가 아는 체하여 돌아보니 동음치에서 하룻밤을 난 함평과 무안 선비였다. 그것도 인연이라고 안부를 묻던 중에 선접군도 무엇도 없이 온 바에야 힘을 모으자는 신통한 의견이 나왔다. 그들에다 병호까지 힘을 쓰고 속필에 능한 기범이가 시제를 옮겨 적는 식으로 대응하자는 것이었다. 일변 기대할만하다고 격려하면서 그들은 과장의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역졸들이 가시울타리를 따라 몰려간 후 궁금해진 기범이가 보고 와서 일러주었다.

“울타리에 불을 지르다 들켰다는군. 미리서 들어가려고 했다는 게여. 말세로군.”

동이 트면서 문이 개방된 모양으로 깔때기 같은 곳으로 사람들이 떠밀렸다. 들어가는 구멍은 작고 들어가려는 사람은 많아 아비규환의 소용돌이가 펼쳐지는데 무언가 와지끈 부러지는 소리에 비명까지 섞여 과장이 아니라 전쟁터라는 만경 선비의 말이 실감났다. 뒤로 거슬러오는 선비 하나는 무슨 일을 겪었는지 머리에서 피를 흘렸고 잠시 후에는 업혀서 대오를 이탈하는 자도 나왔다. 그러나 의기투합한 네 사람이 합심하여 용을 쓰니 밀리지 않는 양상이었다. 쥐어박고 밀치면서 과장에 들고 보니 바닥엔 멍석이 깔렸으며 앞을 차지한 자들은 차일을 치고 지우산을 펼쳐 해자 두르듯 방어막을 치는 중이었다. 병호네는 나란히 앉지 못해도 현제판 가까이 자리 잡았지만 아직도 밖에는 고성과 욕설이 난무하였다. 조흘첩은 사전에 확인했고 호구장적(戶口帳籍)은 관아에서 송부했을 것이므로 시제만 걸리면 될 일이었다. 본래 과장에는 거자들만 입장해야 하지만 떡장수와 술동이를 멘 장꾼들까지 호객에 여념이 없었다. 숙소를 구하느라고 여비를 다 쓴 기범이가 손을 내밀었다.

“출출한데 행하를 좀 내게.”

병호가 엽전 일부를 건네자 기범이는 탁주 두 조롱박을 들이켜고 시원하게 트림까지 하였다. 그는 세필과 먹물 든 병을 챙기고 시제를 적으려고 종이를 잘게 접어 갈무리하였다. 해가 떠오르자 향교 돌계단 쪽 출입문이 열리고 관복 차림의 경시관과 오수찰방이 행차하였다. 이어 차비관이 자리를 잡는데 징소리가 들린 후에 시제를 적은 두루마리가 현제판에 걸렸다. 앞에서부터 와아 하면서 대오가 무너질 즈음,

“빨리들 나서지 않고 뭐하는 게요.”

함평 선비가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갔다. 함평 무안 사내를 따라 병호와 기범이도 튕겨나갔지만 벌써 향교 입구는 엿가락처럼 엉겨 붙어 난리판이었다. 뒤늦게 인파에 뛰어들었으나 뚫고 들어갈 방도가 없어 시제를 적는 데만 한나절 걸릴 거라던 주막집 사내의 말이 되새겨졌다. 병호는 팔을 벌려 기범이를 에워싼 채 뒤를 막고 앞에서는 함평과 무안 선비가 길을 여느라고 구슬땀을 흘렸다. 옆구리가 뜨끔하여 병호는 어떤 놈인가 고개를 돌렸으나 모래밭에서 깨알 찾기였다. 그래도 앞서 시제를 적은 사람이 선접군에 싸여 빠져나가므로 그들에게도 기회가 왔다. 함평 무안 사내와 병호가 힘을 쓰며 밀려드는 무리를 막는 틈에 기범이가 여러 번 접어 두툼해진 한지에 괴발개발 시제를 옮겨 적었다. 현제판 앞을 빠져나오며 보니 기범이의 창의 앞섶이 먹물에 젖고 함평 사내는 갓 테두리가 찌그러져 있었다.

그들이 자리에 돌아간 뒤에도 향교 앞에서는 육박전을 방불케 하는 난리굿이 벌어지고, 과장에 들지 못해 가시울타리 주변을 배회하며 구멍을 뚫어보려는 자의 악다구니와 모든 걸 포기하고 퍼질러 앉아 우는 자의 통곡이 줄을 이었다. 시제를 먼저 적어온 차일 쪽에서는 시부를 어떻게 작성할지 숙덕이는 소리로 왁자그르르한데 거벽끼리 의견이 맞지 않아 논쟁을 벌이는 곳도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대갓집 거자는 지우산 밑에 비스듬히 누워 기생을 끼고 시회에 나선 아비들 흉내를 냈고, 가시울타리 쪽에서는 밖에서 불러주는 자귀를 받아 적는 거자도 있었다.

“젠장, 도떼기시장이 아닌가.”

옆에서 기범이의 웅얼거림이 들려왔으나 시부를 구성하느라고 병호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해가 꼭지에 오르고 시제를 적는 일이 끝났는지 함성과 욕지거리는 사라졌지만 거벽끼리 주고받는 말과 거벽이 써준 글자가 무어냐 묻는 소리로 과장은 석양녘 대숲 같았다. 그런데도 한양에서 온 경시관과 관리들은 귓속말을 주고받으며 무릎을 치고 웃어대면서 무료를 달래는 중이었다. 미리 시제를 적어간 앞줄에서는 시지를 단에 바치고 선접군에 싸여 빠져나가는 자도 있었다.

“아따 여보쇼. 차술(借述)로도 모자라 그리 시끄럽게 굴 건 뭐요? 대놓고 경서를 베끼는 마당에 새우젓이니 소금이니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냔 말요?”

차일 속에 지우산을 세운 앞자리에다 기범이가 하는 말이었다.

“아니 저 자가……. 예가 어느 댁이라고…….”

“어느 댁이나 마나 조용히 좀 하란 말이오. 보아하니 한양에서 굴러온 모양인데 그 잘난 솜씨로 어째 예까지 내려왔냔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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