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명카수’가 되는 길⑤ ‘충무로 다방’에서 무용수로 발탁되다

  • 입력 2024.01.14 18:00
  • 수정 2024.01.14 18:39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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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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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 달 동안 쇼단 전속 가수의 쓴맛을 보았던 김미성이 이번에는 서울의 스카라 극장 앞에 나타났다. 당시에는 쇼 공연단뿐만 아니라 영화를 만드는 영화사들도 사무실 한 칸 없이, 충무로 일대의 다방에 모여서 배우들과 출연 계약을 하고 스태프를 구성하고 물주를 구하고 하던 시절이었다. 김미성이 조심스레 다방 문을 밀고 들어선다.

‘그 악단장하고 무용단장이 찾어오라는 다방이 여그가 틀림없는디….’

널따란 다방은 거의 빈자리가 없을 정도였고, 군데군데 빵모자를 쓴 ‘예술가 모습’의 남자들도 눈에 띄었다. 다탁을 중심으로 여기저기 무리 지어 앉아 있는 모습을 훑어가던 김미성의 눈망울이 금세 놀란 토끼 눈이 되었다.

‘하이고, 저분은 <이정표>를 부른 명카수 남일해 아녀? 워매, <알뜰한 당신>의 황금심도 있고… 맞어, 맞어, 저 사람은 서영춘이여, 서영춘! 앗다, 징하게 유명한 사람들이 다 어디 갔는가 했듬만 여그 다 모여 있구먼. 어? 쩌어그, 저 짝에…맞네, 맞어!’

김미성은 잰걸음으로 창가 쪽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서는 허리를 굽혀 인사부터 했다.

-럭키 송 선생님! 안녕하신가라우?

-어, 이게 누, 누구…더라?

-쩌그 광주에서 쇼 들어올 때마다 극장 맨 앞자리에 앉어 있든 그 김미숙이랑께요. 선생님이 여그 다방으로 찾어오라고 안 했소.

-김미숙이라고? 아, 얼굴 보니 생각난다. 그런데 네 이름이 김영자가 아녔던가?

그러니까 본명은 김청자였는데, 수업을 땡땡이치고 극장을 드나들 때는 김영자로 행세했다. 자칫 교외지도(校外指導) 하러 나온 학교 선생님이나 임검 순경한테 발각되면 정학을 당할 수도 있었으므로. 이후 쇼단에 들어가서는 김미숙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하다가 뒷날 음반을 취입하면서부터 김미성이 된 것이다.

“다방은 사람들 만나서 차 마시고 얘기 나누고 뭐 그런 덴 줄만 알았는데, 거기 충무로 다방들은 그냥 다방이 아니었어요. 악극단 사람들이 모여서 단원들 명단도 작성하고, 어디 어디로 공연 갈 것인지 스케줄도 짜고, 영화 하는 사람들은 책(시나리오) 펴놓고 배역을 의논하고…. 좀 신기했어요. 그런데 고맙게도 럭키 송이 나한테 무용을 해보겠느냐고 묻더라고요.”

-무용이든 노래든 뭣이든 시케만 주면 다 할 것이랑께요.

-그래? 좋다! 너 오늘부터 우리 집에서 지내거라. 내 아내가 쇼단의 무용 선생이야 인마.

이렇게 해서 김미성은 럭키 송이 이끄는 무용팀의 일원이 되었다. 그러니까 쇼단이라고 해서 고정된 구성원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인기 가수나 코미디언을 초빙하고 무용단을 섭외해서 팀이 갖춰지면 지방 순회공연에 나서는 방식이었다. 무용수들끼리도 어느 때는 한 팀이 되었다가 공연이 끝나면 다시 갈라지고 다른 무용수들하고 합쳐서 또 다른 쇼단을 따라나서고 하는 식이었다. 한 시기를 풍미했던 여성 코미디언 이순주도 자신과 함께 지방 순회공연을 다니던 무용수 출신이었다고 김미성 씨는 증언한다.

그렇다고 극장의 쇼 공연에 가수나 무용수나 촌극 배우나 코미디언만 출연하는 건 아니었다. 관객들로부터 누구보다 큰 박수를 받았던 사람들이 또 있었다. 유명한 영화배우들이었다. 극장에서의 공연이 막바지를 향해갈 즈음에, 사회자가 달뜬 목소리로 다음 출연자를 소개한다.

-자, 여러분 기대하십시오. 이번에 모실 출연자가 누구냐!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영화 <미워도 다시 한번>에서 팬들의 심금을 울렸던, 영화계 최고의 스타 문희씨를 모시겠습니다!

극장이 떠나갈 듯한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온다. 윤정희, 남정임과 함께 제1세대 여배우 트로이카 시대를 열었던 영화배우 문희가 쇼단의 지방 순회공연에도 함께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문희 등 영화계의 톱스타들은 공연장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지만, 사람들은 그보다 은막의 스타를 실제로 구경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감격스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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