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은 과장(科場)이 아니라 전쟁터입니다”

  • 입력 2024.01.14 18:00
  • 수정 2024.01.14 18:39
  • 기자명 이광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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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호네 집 토방에는 할머니와 아버지 신발 외에도 둥구니신 두 켤레가 놓여 있었다. 황새마을 살 때부터 기창은 약초꾼이나 심마니들과 교류하더니 약재를 받아 중개하는 일로 거간비를 챙겼다. 기창이 어떤 연고로 그들과 어울리는지 알 수 없지만 양반네와도 교류하는 편이라 호구책이 될 만하였다. 병호가 들어서자 백구가 손을 핥으며 법석을 떨었다. 지금실로 옮겨올 적에 거야마을 이모할머니가 선물한 강아지는 어느덧 버티고 서면 늠름한 기상이 엿보였다. 유난히 장씨를 따라 외출할 때 같이 갔다가 한발 앞서 돌아오므로 집에서는 할머니의 귀가를 미리서 알 정도였다.

“종정마을에 다녀왔습니다.”

문이 열리는데 예상대로 방에는 기창과 중년 사내들이 함께 있었다.

“소과 일시가 잡혔다 하여 기범이와 상의할까 합니다.”

“언제 어디서 본다더냐?”

“이월 그믐에 무장에서 치른다 합니다.”

“알았다.”

문이 닫혔고 그가 기범이네에 와서 눈발을 털자 따라온 백구도 몸을 흔들었다.

“아따 이눔아, 물 튄다. 그만 돌아가라.”

행전과 버선을 치우고 안에 들자 소반을 놓고 두 사람은 벌써 수작질이었다. 병호의 집에서 끼니를 메우는 통에 기범이네는 반찬이랄 게 없어 가을에 장만해둔 곶감과 밤이 안주였다. 아내를 묻고 돌아와 기범이는 종일 누워 지낼 뿐 활을 쏘재도 고개만 저었다. 과거 핑계로 밥만 먹으면 아랫집을 찾게 되고 제 방에는 약재가 쌓여 병호는 그와 함께 자는 날도 많았다. 그런데 허구한 날 누울 작정만 하니 절로 나태해지는 듯하여 어떻게든 일으켜보려 하였으나 허사였다. 병호는 스승이 내준 종이를 꺼냈다.

“흥, 식년시를 치른다는 말이니 세상은 나 없이도 잘 돌아가는구나.”

기범이는 종일 누워있었는지 상투에서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그러니 털고 일어나 같이 세상을 돌리자꾸나.”

“과거 같은 거 말고 더 가슴 뛸 일은 없을까?”

기범이는 쪽지를 치우고 잔을 들이켰다. 잔을 들며 희옥이가 말하였다.

“자리에서 일어나야 가슴 뛸 일도 생기겠지.”

“그는 맞는 말이군.”

병호가 쪽지를 챙겨 간수하였다.

“이번 달 중순에 조흘강을 치른다니『소학』권부터 들여다보세.”

“그 일이 내 길인지 결론을 못 지었는걸.”

희옥이가 농을 던졌다.

“조흘첩을 못 받을까 겁내는 게여?”

“그래 이눔아, 되우 겁난다.”

“똥 뀌고 성낸다더니 유붕자원방래하였는데 행악질일세.”

병호가 잔을 비우고 밤 한 톨을 입에 넣었다.

“길을 알지 못하거든 권고를 따르는 것도 방편일세.”

술이 떨어지자 기범이가 촛농으로 봉한 호리병을 찾아왔다.

“웬 술이 이리 향기로운고? 감로주가 따로 없네그려.”

“재작년 가을에 유혈목이를 잡아 담갔으니 마땅찮거든 들지 말어.”

희옥이가 눈을 치떴다.

“실컷 먹여놓고서 무슨 흰소리여?”

“사주를 먹으면 뜨끈하게 데우고 땀을 빼야 한다누만. 있는 장작 처지르고 준비를 해보세그려.”

“사주를 먹여놓고서 저는 시험 준비를 한다니……. 나는 무얼 하누?”

“얼른 마시고 전주 서문거리라도 찾으려무나.”

기범이가 말하는 서문거리란 색주가가 있는 곳이었다.

“숭악한 자 같으니라구.”

세 동무는 차츰 흥이 올라 취하는 줄 모르고 마셨다.

 

이월 중순의 조흘강에서 두 사람은 무사히 조흘첩을 받았다. 들려오기를 향시가 열리는 고을에는 일찌감치 대어가야 한다 하므로 시험을 열흘 남기고 길을 나섰다. 정읍에서 요기하고 다시 출발했으나 기범이가 온갖 것을 상관하느라 길이 지체되었다. 뒤늦게 흥덕에 도착한 두 사람은 주막을 기웃거렸으나 어디라도 사람이 가득해 차지할 봉놋방이 없었다. 다행히 관아에서 멀리 떨어진 주막에 혼자 국밥을 먹던 선비가 방이 좁지만 부대껴보자며 고마운 청을 하였다.

“탁주는 우리가 사리다.”

기범이가 국밥과 탁주를 시키자 먼저 와 있던 선비가,

“만경에서 오는 길입니다.”

하고 자신을 소개하였다. 기범이가 사내의 잔에 술을 쳤다.

“우린 태인에서 옵니다.”

“아직 젊은 것을 보니 처음인가 합니다.”

“처음입니다. 흥덕에서도 이 난리인데 무장이라고 숙소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한 달 전부터 죽치고들 있을 겝니다. 내야 형편이 빠듯해 이제야 나섰지만 두 분도 운이 좋기를 바라야 할 겁니다.”

“응시자가 그렇게나 많답니까?”

“많다 뿐이오. 이제 두고 보시오. 그곳은 과장(科場)이 아니라 전쟁터입니다.”

사내는 잘 되었다 싶었던지 따라주는 술을 날름날름 받아 마셨다. 귀동냥하는 값으로 병호는 중노미를 불러 탁주를 더 내오게 하였다.

“과장에 들어 시험이나 보면 되지 전쟁터일 건 뭐란 말이오?”

“허허, 세상 물정을 통 모르시는구려. 시험을 보려는 자만도 기천이요, 거자(擧子)에 딸려오는 대갓집 종놈이 대여섯이라오. 어디 그뿐이오? 양반가에선 선접군(先接軍)을 대동하는데 문이 열리면 현제판(懸題板) 가까이 자리를 맡는 자입니다. 시제를 먼저 적는 자리가 명당이다 이겁니다. 선접군은 장막을 친다 자리를 깐다 우산 씌우는 일까지 도맡아 진행하지요.”

기범이가 잔을 비우고 끄윽 트림을 하였다.

“과장에 장막을 치고 우산을 편단 말이오?”

“아무리 생짜라도 뭘 알아야 장단이 맞지. 부호가의 자제는 거벽(巨擘) 사수(寫手)까지 접으로 움직인단 말이오. 현제판의 문제를 적어오면 거벽이 글을 짓고 사수가 그럴싸하게 옮겨 적는다 이 말입니다.”

“예끼 여보쇼. 처음이라고 이리 놀리는 법이 어딨소? 보아하니 술잔이나 우려먹으려는 수작이지.”

“어허, 이 양반들 코 베이겠구만. 내 말이 틀리는지 이제 두고 보슈.”

기범이와 병호는 이튿날 밥값까지 치르고 만경 선비와 몸을 뉘었다. 종일 걸어 고단했던지 만경 선비는 코를 고는데 병호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눈살 찌푸릴 일이 있어도 실력 발휘할 생각만 하라던 송진사의 말이 만경 선비가 쏟아낸 어처구니없는 일을 뜻하는가 하여 어리둥절했던 것이다.

이튿날 점심쯤 무장에 도착한 두 사람은 관아를 둘러싼 성곽 주변의 인파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선비 복장뿐 아니라 파락지류로 보이는 자들과 잠방이만 걸친 어느 댁 가노들, 행색은 초라하지만 얼굴은 멀끔한 자와 과장의 질서를 유지하려고 동원된 역졸에 이르기까지 무장은 그야말로 끓는 여물 한가지였다. 그런 인파에 묻히면 점심은 고사하고 노숙이라도 해야 할 판이라 무엇보다 숙소를 구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그러나 주막마다 사람을 받지 못한다 하므로 관아에서 이십 리나 떨어진 동음치면에서 다른 선비들과 방을 나눠 쓰기로 하고 그들은 자리를 얻어들었다. 함평이며 무안에서 왔다는 선비들과 좁은 방에 끼어 자면서 시제는 오경의에서 나온다커니 사서의라커니 헛공론으로 밤이 짧았다. 그랬는데 식전 댓바람부터 기범이가 답사를 가자고 부산을 떨어 우물물로 허기를 면하고 둘이는 읍내로 나왔다. 과장은 관아와 향교 앞 빈터인데 그들에게 배당된 곳은 향교 앞이었다. 향교 근처를 배회하고 읍성 앞에서 국밥을 뜨는데 중년 사내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혹시 거벽이 필요치 않소?”

“어째 그러시오?”

사내는 넉살 좋게 끼어 앉으며 사설을 늘어놓았다.

“내가 이래봬도 이서 노릇만 십오 년 넘게 했습니다. 어떤 문제든 이 머릿속에 다 들어있다 이 말입니다. 내가 생원 진사를 시켜준 사람만 줄잡아 열 명은 될 겝니다. 댁네들은 행운인 줄 아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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