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메주를 띄우며

  • 입력 2024.01.07 18:00
  • 수정 2024.01.07 18:28
  • 기자명 정성숙(전남 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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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숙(전남 진도)
정성숙(전남 진도)

12월이 되었어도 봄날처럼 따뜻해서 밭둑의 감나무 가지를 전정가위로 자르는데 땀이 났다. 그러던 날씨가 갑자기 추워지더니 이틀 동안 눈이 내렸다. 내가 사는 지역에서는 밤에 눈이 쌓였더라도 낮에는 거의 녹는다. 그런데 이번에는 낮 동안 쌓인 눈이 더 많았다. 대문 안팎으로 드나들 수 있는 길을 내느라 눈을 치우는데, 그 높이가 30cm를 넘었다. 트럭 짐칸에도 쌀가루를 실어 놓은 듯 눈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갑작스럽게 돌변하는 날씨에 자주 놀랐다가 이제는 두렵다. 입장이 달라서 눈엣가시로 여겨지는 사람이나 조직이 있으면 권력이라는 몽둥이를 휘둘러서 압수수색과 구속을 무시로 한다. 그것도 모자라 매스컴을 동원해서 어제까지 멀쩡했던 사람을 생매장하는 국가 기관처럼 날씨가 무자비하다.

처마에 매달아 놓은 메주가 30일도 지나지 않았는데 흰색 곰팡이가 생기고 있었다. 메주가 마르는 과정에서 흰색 곰팡이가 생기는 경우는 처음 봤다. 따뜻한 겨울날이 메주에까지 영향을 미치리라 짐작을 못했다. 서둘러서 방안으로 메주를 들였다. 박스 안에 짚을 깔고 메주를 차곡차곡 담은 다음 그 위에 또 짚을 덮었다. 맨 위에 담요까지 덮어놨다.

해마다 띄우던 메주를 몇 년 전부터는 2년에 한 번씩 하고 있다. 올해는 2말의 메주를 쒔으니 3년은 메주를 쑤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콩 타작하느라 진을 뺀 적이 있어서 절대로 콩을 심지 않으리라는 결심을 했었는데 그 결심은 절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참깨·들깨 등을 심고도 남은 자투리 땅에 결국 콩을 심었다. 벌레가 성하면 콩 고르는 시간을 많이 써야 하기 때문에 농약을 자주 쳤다. 기술센터에서 콩 수확기를 빌려다 타작했더니 아주 수월했다. 한 말 수확을 예상하고 심었다 3말이 더 나왔는데 타작 후의 잔손질까지 누워서 껌 씹는 것처럼 가벼웠다. 남편이 없으면 여자인 나 혼자서는 그 기계마저 활용할 수 없었으리라. 신세계를 본 듯했다. 이렇듯 좋은 문명이 있었는데 작대기를 내리치느라 손바닥에 물집이 생기도록 힘을 썼던 지난날의 수고가 어이없었다.

이 지역에 사는 고등학교 동창 중에 메주를 만드는 이는 내가 유일하다. 메주를 쑤고 띄워서 된장과 간장으로 가르고 또 간장을 달이기까지의 과정이 아파트에서는 어려울 수밖에. 농촌이 아닌 곳에서는 메주를 띄울 때 꼭 필요한 짚을 구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게다가 전업주부가 있었고 집안에 노동 인력이 많았던 시대가 아니다. 아마도 도시 가정의 집 된장은 거의가 농촌에서 올라간 것이 아닐까 싶다.

기나긴 발효의 시간을 줄이느라고 유전자 조작 콩의 단백질을 염산으로 분해시킨 후 여러 가지 첨가물로 맛을 낸 대기업의 간장을 먹고 싶지 않아서 조림간장을 만들어 먹는다. 감칠맛을 내는 데 필요한 다시마와 표고버섯, 약간의 단맛을 내기 위한 양파와 무 또는 사과나 배, 그리고 대파·생강·디포리를 넣고 끓인다. 재료의 맛이 충분히 우러났을 때 건져내고 집간장으로 간을 맞춘다. 방부제를 넣지 않아서 쉬 상할 수 있으니 냉장고에 보관한다. 날씨가 따뜻할 때는 3~4일에 한 번씩 끓여서 식힌 다음 다시 냉장 보관해야 한다. 김치냉장고에 넣어두면 더 오랫동안 맛이 변하지 않았다.

농사짓는 나조차 메주 쑤는 번거로움에서 벗어나려고 점점 꾀를 부리고 있다. 절묘하게도 11월에 메주를 쒀서 3월에 장 달이는 것까지가 농한기에 하는 일이라 지속할 수 있는 것 같다. 쌀 다음으로 중요한 메주의 활용은 농사의 절기에 맞춰서 수 세기에 걸쳐 이어져 온 식생활의 리듬이다. 이 리듬과 지속성이 농업의 지속가능성과 밀착되어 있는데, 내 세대 다음의 정월에도 방안에서 메주가 곰팡이를 만들며 발효를 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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