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정신문 한승호 기자]
시금치를 캔다. 방수복을 입고 일방석에 앉아 낫으로 뿌리를 캐 올린다. 겨우내 언 땅을 뚫고 올라온 시금치다. 지난해 10월에 파종, 11월에 수확을 시작해 한겨울이 제철인, 남해의 시금치, ‘보물초’다.
파란 바구니엔 앞서 캔 시금치가 수북이 쌓여있고 그 앞엔 ‘남해군 보물초’라 적힌 하얀 비닐에 10kg씩 담아 무게를 잴 저울이 놓여있다. 뿌리에 붙은 흙을 털어내느라 목장갑은 이미 흙범벅이다.
날이 조금 풀리고 남도의 섬이라 한낮 기온은 영상이지만 바다에서 불어오는 겨울바람은 옷깃을 여미게 할 정도로 오싹한 추위를 몰고 온다. 털모자를 쓰고 두툼한 패딩까지 입었지만 언 땅에서 올라온 한기와 바닷바람은 장갑 낀 손을 시리게 할 정도다.
이런 해풍의 영향으로 보물초는 웃자라지 않고 뿌리를 중심으로 옆으로 퍼지며 자란다. 하여, 뿌리부터 줄기와 잎까지 영양분이 고르게 퍼져 당도가 높다. 그 달큼한 맛을 내느라 추위를 견디고 해풍을 맞으며 자랐기에 소비자에게 인기도 많다. 한겨울, 경남 남해 농민들의 주요 소득원으로 보물초를 빼놓을 수 없는 이유다.
새해 이튿날, 석양이 진다. 석양의 붉은빛에 반사된 탓일까. 여전한 추위에 상기된 탓일까. 여성농민의 얼굴빛이 더욱 붉게 도드라진다. 올해 아흔하나, 정근심(이동면 초음리) 할머니다. “논에 오믄 앉아서 일하는 게 편히.”
정 할머니의 일성만큼 초음리 들녘, 파릇파릇한 시금치밭 위엔 농민들이 드문드문 앉아 보물을 캐듯 손을 놀리느라 여념이 없다. 가만히 서서 그 풍경을 바라본다. 보물초의 달큼한 맛은, 겨우내 궂은 날씨에도 아랑곳없이, 들녘에 엎드린 저 농민들의 땀이 깊게 밴 맛이라는 것을 그제야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