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란 산 사람의 몫이 아닌가

  • 입력 2024.01.01 00:00
  • 수정 2024.01.05 14:02
  • 기자명 이광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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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깟 임금 노릇 내가 못할 줄 아슈? 싸그리 갈아버릴 테여.”

“어허, 이 사람 임금 시키면 큰일 내겠구먼. 기범이가 임금 되면 난 줄행랑이네.”

“그러면 까짓것 뽑기를 해서 돌립시다.”

“뽑기 잘못하면 그 좋은 것을 나는 한 번도 못 하겠구려.”

“앗따, 희옥이 아우도 임금 욕심이 있네그려.”

“남들 다 하는 걸 나만 못하면 어찌 삽니까. 여게 기범이, 일을 하려거든 빨리 하세그려. 내일이라도 방 내걸고 돼지 서리하듯 해치우자구.”

사람들이 와하하 웃었고 소리가 골짜기를 적셨다. 숯불에 고기가 익어가고 술이 있으며 잉걸불과 모깃불은 벌겋게 타는데 뜻 맞는 동무들이 모였으니 그들은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기범이는 사흘에 한 번꼴로 원터마을에 넘어가 이씨의 병세를 살폈다. 그녀는 호전되는 기미 없이 그만그만하였는데 진맥하던 병호 아버지가 이튿날 약재를 건네며 달여 먹이라 하니 잠시 차도가 있었으나 도로 그 자리였다. 살 맞대고 산 것은 일 년도 못 되지만 그녀는 살면서 새로 알게 된 즐거움이며 보람이었다. 들끓던 자리가 가라앉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어려서 어머니를 여읜 후 보드라운 살핌을 알지 못하였는데 깨닫게 하였던 것이다. 손에 물 묻히지 않고 자랐건만 기범이의 글공부를 위하여 논일 밭일을 척척 해낸 것도 눈물겨운 정경이었다. 전날 얼굴에 홍조가 비쳐 원터마을에서 돌아오는 그의 발걸음은 한결 가벼웠었다. 그랬는데 조반 직후에 좀 왔으면 한다며 처남이 발 빠른 사람을 보내왔기로 옷을 입고 나설 참에 병호가 내려왔다. 기범이의 집이 한가로워 두 사람은 그곳에서 제술을 짓고 담론도 하였다.

“처가에서 보자 하니 나서는 중이네.”

말을 듣고 병호는 낯을 흐렸다.

“내가 거들 일은 없을까?”

“다녀와서 이야기하지.”

기범이는 처가에서 보낸 사람을 따라 점심나절쯤 원터마을에 닿았다. 안채의 장모에게 문안을 하고 환자가 있는 방에 가보니 어제까지도 화색이 돌던 이씨의 얼굴이 흙빛이나 다름없었다. 그를 본 이씨가 입술을 달싹이므로 허리를 숙이고 들어보니 미음을 달라는 소리였다. 밖에 대고 말을 전하자 장모가 버섯 넣고 끓인 미음을 들여왔다. 장모가 하겠다는 것을 직접 입에 넣어주었으나 이씨는 세 숟가락을 넘긴 후 물을 달라더니 입을 헹궜다. 장모가 소반을 들고 나간 뒤 눕게 하였더니 그녀가 모기소리만 하게 일렀다.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유감없기를 바라므로 두어 숟갈 떴습니다. 저는 이제 지금실로 가고 싶습니다.”

“그 몸으로 어딜 간단 말이오. 차도가 있거든 그때 옮깁시다.”

사람들 앞에서는 센 척하였으나 기범이의 눈두덩이 뜨거워졌다.

“무슨 업장이 많은지 폐만 끼쳤습니다. 이제 절랑은 잊으시고 서방님 살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 서방님을 놓아드리라고 데려가나 봅니다.”

“힘든데 말씀 그만하시구려.”

기범이의 말을 따르는지 거기까지 하고서 눈을 감더니 그녀는 잠드는 눈치였다. 그악스런 여름이 물러가는 기색이라 이불 밑에 손을 넣었으나 온기가 맞춤하였다. 나가서 한 죽 태울까 망설이는데 이씨의 숨결이 약해지면서 들숨과 날숨의 사이가 차츰 버는 듯하였다. 사실을 알리자 장모와 손위 처남과 처남댁이 들어왔다. 다행히 고통은 느끼지 않는 모양이나 계절이 변할 때처럼 환자의 호흡은 완만하지만 뚜렷이 더디어졌다. 이윽고 사이가 뜨던 숨결은 햇빛이 묽어질 즈음 서너 번 크게 들썩인 뒤에 멀리서 들리던 범종소리가 소리인 듯 아닌 듯 구분 없이 되는 순간처럼 사그라들었다. 어둠이 내려와 뚜렷한 형상을 감싸다 모든 것을 삼킬 때처럼 그것은 거역할 엄두도 낼 수 없는 엄정한 장면 같았다. 장모가 딸의 이름을 외쳐 부르고 처남과 처남댁이 곡을 하였으며 기범이도 그때엔 뜨거운 한 줄기를 흘렸다. 곡성을 듣고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멀어지더니 염장이가 나타났다며 남정네들을 불러냈다. 기범이가 곰방대에 연초를 재우는데 사라졌던 손위 처남이 다시 나타났다.

“내 말 잘 듣게. 출가외인의 상을 여기서 치르는 건 예가 아닌 것 같다고…… 아버님 생각도 이해해주면 하네만…….”

지은 죄 없이 안절부절못하는 처남에게 기범이는 선뜻 말하였다.

“그렇잖아도 지금실로 가겠다 합디다. 달구지나 하나 내주고 원정마을 장형님 댁에 연통이나 넣어주시우.”

기범이가 승낙하자 말을 전했는지 빠르게 일이 진행되었다. 그 길로 염장이는 염을 하고 입관까지 하였으며 어디선가 대령한 상여에 마을 사람 몇이 관을 얹어 달구지에 실었다. 장모가 이렇게는 못 보낸다고 상여를 잡고 울다가 혼절하여 잠시 지체되었으나 달구지는 곧 원터마을을 출발하였다. 노을이 걷힐 무렵 처가의 행랑아범과 지금실에 당도하자 병호와 그의 아버지가 상여 내리는 일과 방에 관 들이는 일, 병풍치고 향 피우는 일을 거들었다.

“상을 어떻게 치를 텐가. 격식대로 하겠다면 맡아서 돕겠네.”

급한 일이 끝나고 병호 아버지가 위로하며 말을 건넸다.

“바로 뒤에 선산이 있으니 장형님과 의논하여 내일이라도 끝내겠습니다.”

아내의 장례를 처가에서 거부한단 말에 그럴 만하다 여기면서도 격식이며 체면 따위 기범이는 따지지 않기로 하였던 것이다. 달구지와 함께 돌아오며 생각해보니 제례니 뭐니 그딴 일은 지킬 의무를 진 쪽이나 지키면 될 일이었다. 그는 이미 양반도 아니고 호사를 독점하려는 자들의 구색 맞추기 찌끄레기에 지나지 않았다.

어둠이 깊어지자 원정마을 형님 내외와 가까이 지내던 이웃들이 지금실을 찾아왔다. 기창이 주선하여 동곡마을에서 공동으로 사용하는 제구며 땔감을 보내와 동구에 차일을 치고 불을 지폈다. 병호 할머니까지 나서서 밥이며 국물을 지어내고 솥뚜껑에 전을 부쳐 조문하는 사람을 맞았다. 기범이네 마을에서 실어 온 술동이가 열리고 어디선가 돼지고기가 날라져 오는데 누가 지시한 바도 없건만 해오던 일처럼 모든 일이 삽시에 이루어졌다. 장례에 관하여 기범이의 장형은 이씨를 선산에 매장하는 게 당연하다며 원정마을 청년들에게 파토를 하도록 지시하였다. 질서가 잡히자 병호는 상두재를 넘어 거야마을에 소식을 전했고 필상이 쌀가마를 싣고 나타났다.

동이 트기 무섭게 병풍 앞에 음식을 차리고 제를 올린 후 기범이의 동무들이 상여를 맸다. 젊은 사람들이 힘을 쓴 탓인지 묘혈은 깊숙하였고, 모든 절차를 약식으로 처리한 뒤 관에 무명을 걸어 하관하였다. 흙을 잘 다져야 짐승의 침탈을 막고 육탈도 잘 된다며 장례를 주관하는 어른이 가족에게 관 위의 흙을 꾹꾹 눌러 밟으라고 주문했지만 말을 따르면서도 기범이는 힘주어 밟지를 못하였다. 헐벗은 몸뚱이처럼 선연한 봉분이 만들어지고 뗏장을 입히는 일까지 사람을 저편으로 돌려보내는 일이 너무도 거침없고 빠르게 치러졌다.

산다는 것은 티끌로 떠다니다 바람 없는 날 내려앉아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일이로구나. 죽음이란 망자가 아니라 산 사람의 몫이 아닌가. 모든 악다구니는 산 자의 방식이니 어차피 산 자들은 다시금 복대길 것이며, 그들이 사는 이 세상이 진실로 문제였다. 수의를 입히고 그 위를 무명으로 동여맸을 때 별것인 줄 알았던 사람이 부러져 뒹구는 나무토막과 실은 아무런 차이도 없었다. 없어진 자는 없어진 것이니 아무것도 아니요, 없어져 버린 것을 안고 사는 자들과 그를 둘러싼 이쪽의 이 생생한 질감이 정녕 문제였다. 일꾼들이 삽등으로 봉분을 두드리며 흙을 다질 즈음 조문객들은 올랐던 산을 느릿하게 내려왔다. 모든 것은 난리 속처럼 떠밀리며 그렇게 경황없이 끝나버렸던 것이다.

조문객들이 돌아가고 기범이의 동무들만 오후까지 남아 점심을 먹었다. 여름이 한창일 제 숯막에서 너나들이로 마실 때와는 딴판으로 목소리는 나지막하였고 누구도 우스갯소리를 하지 않았다. 날이 어둑해져 마지막 술자리가 파하자 기범이를 대신해 병호가 동구에서 동무들을 배웅하였다. 그날 밤 병호는 집에 건너가지 않고 기범이와 나란히 누웠다. 어둠이 깊어져 부엉이만 호르륵 뜸을 들이는데 뒤척이던 기범이가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사랑이 위험한 것을 이번에 알았네그려.”

그 말을 듣고 돌아눕던 병호가 한마디 하였다.

“많은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더 위험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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