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명카수’가 되는 길③ 쇼단의 ‘전속 카수’가 되다

  • 입력 2024.01.01 00:00
  • 수정 2024.01.01 00:15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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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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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의 어느 봄날, 서울 홍제동의 주택가 골목으로 한 소녀가 들어서더니 여긴가 저긴가 연신 사위를 두리번거린다. 등에는 세 살쯤 돼 보이는 아이를 업었다.

-요상한 일이구먼. 화살표에는 분멩히 이쪽으로 가라고 돼 있었는디….

골목길에서 다시 갈라진 작은 골목들을 두세 번 더 드나들더니, 드디어 어느 가정집 대문 앞에 선다. 소녀가 이마의 땀을 훔치고 심호흡을 하더니 이윽고 대문을 밀고 들어선다.

-누군가? 아니, 웬 아가씨가…처녀 같은데 애는 들쳐 업고서….

오십 줄의 주인 남자가 소녀의 행색을 잠시 훑어보며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소녀가 씩씩하게 말한다.

-아, 업고 있는 애기는 지 동생이구먼이라우. 쩌어그 큰길 전봇대에 가수하고 배우 모집한다는 광고 붙여 논 것 보고 왔는디….

-아하, 그러니까 아가씨가 배우도 되고 싶고 가수도 되고 싶다고? 사투리 쓰는 것 보니까 저 아랫녘에서 온 것 같은데, 설마 전라도에서 여기까지 동생을 업고 온 것은 아니겠지?

-광주에서 중학 졸업하고 메칠 전에 불광동으로 이사를 왔어라우. 지 이름은 김미숙인디….

“그때는 서울 시내 전봇대나 담벼락 여기저기에 ‘가수 모집’, ‘배우 모집’ 그런 광고가 심심찮게 붙어 있었어요. 찾아간 집은 허름했는데 쇼단의 단장 집이었어요. 내가 전봇대 광고 보고 왔다면서 전라도 사투리로, 가수도 배우도 다 하고 싶다고 당돌하게 얘기를 하니까 막 웃더라고요. 참 맹랑한 아가씨라고. 들어오라고 해서 방으로 들어갔더니 연극 대사를 적은 종이 한 장을 주더라고요, 심청전에 나오는 뺑덕어미 대사였어요.”

국민학교 때부터 쇼단이나 악단의 공연이 열리는 극장마다 찾아다니며 숱한 배우들의 연기를 보고 들었던 터라, 나름으로는 뺑덕어미의 간사하고도 요염한 대사를 제법 흉내를 낸다고 내었다. 그녀는 ‘아들 자(子)’ 자가 들어가는 김청자라는 본명은 왠지 좀 촌스러운 것 같아서 ‘미숙’이라는 새로운 예명도 미리 지어 두었으니 이제 합격만 하면 된다.

-연기는 그만하면 됐고 이번엔 노래 실력을 테스트 해볼까? ‘봄날은 간다’ 불러봐라.

-예, 그럼 부르겄습니다이.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길에 /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아, 됐다, 됐어. 그만하고 우는 동생이나 좀 달래라. 너 말고도 이미 여러 명이 여기 와서 테스트를 받았으니까, 합격인지 불합격인지는 나중에 집으로 통보를 해주마.

그리고 며칠 뒤, 합격 통지서가 집에 도착했다. 김청자, 김미숙…아니 김미성은 고민에 빠졌다. 당시 아버지는 사업에 실패해서 실의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고, 게다가 새어머니에 어린 이복동생까지 있었으니 집안 분위기가 영 편치 못했다.

“암만 생각해도 제가 집에 없는 게 더 낫겠다 싶더라고요. 아버지한테 얘기했어요. 연예계에 진출해서 성공한 다음에 돌아오겠다고. 물론 아버지는 펄쩍 뛰지요. 서울에 기고 난 사람들이 쌔고 쌨는데 시골에서 갓 올라온 네가 뭘 하겠다고 그러느냐, 잠자코 있다가 좋은 배필 만나서 아들딸 낳고 오순도순 사는 것이 애비 소원이다, 뭐 그런 얘기였어요. 하지만 애당초 연예인이 되겠다는 바람기가 가슴속에 꽉 차 있었는데 그걸 말릴 수가 있나요.”

사춘기 소녀 김미성은(이후로 연재 글의 지문에서는 ‘김미성’으로 통일하여 칭할 것임) 새벽에 보퉁이를 챙겨 들고는 몰래 집을 나섰다. 그녀의 이른바 ‘딴따라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쇼단의 단장은 무단가출을 감행한 김미성을 다른 단원들과 함께 기차에 태웠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로 열차에 올랐다.

“밥하는 아줌마를 포함해서 단원이 모두 여덟 명이었어요. 그들이 맡은 역할은 연극배우, 변사, 만담꾼…등이었는데, 노래하는 가수는 나이가 가장 어린 저 한 사람이었어요. 단장이 저를 친척인 것처럼 소개를 했기 때문에 단원들이 모두 잘 대해 주더라고요.”

쇼단의 단원들이 기차에서 내린 곳은 충청도 서산이었다. 그녀가 데뷔 무대를 가질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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