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명카수’가 되는 길② 아무도 못 말릴 ‘딴따라’ 기질

  • 입력 2023.12.24 18:00
  • 수정 2023.12.24 19:05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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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이상락 소설가

2003년 6월 어느 날에 김미성 가수를 만났다. 나는 우선 약속 장소에 나타난 그의 차림새에 조금 놀랐다. 환갑이 넘은 나이(61세)였음에도 노출이 과하다 싶은 민소매 가죽 자켓에다 허옇게 닳은 청바지를 받쳐 입었다. 허리에는 옛 서부영화에 나오는 배우들이나 착용했음 직한 요란한 장식이 달린 가죽 벨트를 둘렀다. 누가 봐도 ‘무대의상’이었는데, 그는 평상복 차림이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역시 ‘연예인’이었다. 그가 내게 물었다.

“대중가요 좋아하세요? 제 노래 중에서 혹시 아는 노래가…”

“물론 있지요. ‘꽃길 따라 걷던 길에 비가 내리면…’ 그 노래도 알고, ‘아쉬움’도 알고요.”

“아, 꽃길 따라…그 노래는 제목이 ‘꿈속의 거리’이고요, ‘아쉬움’은…제 데뷔곡이에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가 지그시 눈을 감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가만가만 노래를 불렀다.

그대가 떠나간 뒤에 잊겠지 생각했는데 / 생각하면 할수록 그리움 내 맘에 밀리네…

그 대목에서 목소리가 조금 흔들리는가 싶더니, 이윽고 노래를 멈추고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쉬움’이라는 노래를 떠올리면 데뷔 시절의 애환이 밀려오는 듯했다. 하는 수 없이 내가 나서서 ‘잊지 못할 사랑이면 보내지나 말 것을…’ 그 뒷부분을 이어서 흥얼거렸다.

20여 년의 무명시절과 결코 길지 않았던 인기가수 시절을 되새겨보자고 작심하고 나왔으니, 어찌 아쉬움과 회한이 없겠는가. 이제부터, 만만치 않은 곡절을 헤쳐온 이 노(老) 가수의 이력서를 함께 들여다보기로 한다.

다시 김청자(김미성의 본명)가 광주에서 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로 돌아가 보자.

-야, 청자야, 동방극장에 쇼 들어왔단 소식 들었어? 시방 극장 앞에서 나팔을 불고 난리가 나부렀당께. 송민도라든가 하는 남자가수 하고 또 여자가수 중에는….

-바보야, 송민도는 남자가 아니라 ‘나 하나의 사랑’을 부른 여자가수여. 이번에 동방극장에 송민도 말고도 고운봉, 고봉산, 백설희, 정 마리아 이런 가수들도 나온당께.

-앗다, 청자 너는 장차 명카수가 될 사람잉께 몰르는 거이 없다 이.

-악단장 이름은 이상화고 무용단장 이름은 ‘럭키 송’이여.

-뭣이여? 이름이 럭키…송이라고? 뭔 성이 ‘럭’씨가 다 있다냐?

-그라면 너 오늘도 학교 수업 다 안 받고 쇼 보러 도망갈 것이여?

-쉬잇, 영숙아, 이따 5교시 필기할 때 뒷문으로 살짝 도망칠 것잉께, 6교시 출석은 너가 대신 대답해 주고, 수업 끝나면 내 가방 조깐 갖고 나와 이? 너 줄라고 오징어 갖고 왔당께.

“쇼만 들어왔다 하면 마음이 들떠서 공부가 안돼요. 그래서 선생님이 필기하는 틈에 살금살금 뒷문으로 빠져나가지요. 내 짝이 마른오징어를 무척 좋아했는데 오징어 다리 몇 개만 챙겨놨다 주면 나 대신 알아서 다 해줘요. 그럼 나는 극장으로 직행하는 거지요.”

그 시절엔 인기 연예인들이 쇼단의 초청을 받아 지방을 순회하면서 노래도 하고 무용도 하고 만담도 들려주고 그랬다. 어린 김청자는 무대 턱밑에 쪼그리고 앉아서 송민도, 남일해, 고복수, 황금심, 박재란 등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두 손에 진땀까지 흘려가며 구경을 하곤 했다. 동방극장이든 신영극장이든 태평극장이든 쇼 공연이 있을 때마다 뻔질나게 극장을 드나들다 보니, 자주 오는 공연팀 관계자들 사이에서 김청자라는 꼬마는 이미 유명인이 되어버렸다.

“그러다 중학 2학년 때의 어느 날이었는데, 튀밥 한 봉지를 사 들고서 극장의 분장실로 쳐들어갔어요. 나는 가수도 되고 싶고 무용도 배우고 싶고 연극도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고 다짜고짜 물었지요. 그랬더니 악단장이 말하기를, 중학을 졸업하고 나서 서울 스카라극장 근처 무슨 다방으로 자기를 찾아오래요. 뭐 그래서 별수 없이 중학 졸업장은 따야겠구나, 생각했지요.”어쨌든 김청자는 그 나이에 일찌감치 ‘딴따라’가 되겠노라 작심을 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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