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칼럼] 농촌에 살면 철이 든다

  • 입력 2023.12.24 18:00
  • 수정 2023.12.24 19:05
  • 기자명 김현지(전남 곡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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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지(전남 곡성)
김현지(전남 곡성)

30대 후반까지 도시에서 살면서 계절은 그저 덥고, 춥고가 반복되고 거기에 맞게 옷을 갈아입는 정도의 의미가 있었고 생활 속의 변화는 거의 없었다. 쳇바퀴 돌 듯 사는 삶은 계절과는 별개였고, 가끔 저녁에 친구들과 술 한 잔하는 걸로 위안을 찾을 뿐 참 허한 삶이었다.

여러 고민 끝에 귀농을 하고 시골에 와서 가장 먼저 느낀 것은 계절의 변화였다. 봄·여름·가을·겨울마다 피고 지는 것도 다르고, 할 일도 다 달랐다. 드디어 철을 알게 된 것이다.

온갖 생명들이 움트는 봄에는 씨앗을 뿌리지만 뿌리지 않아도 절로 올라오는 봄나물이 지천이고, 풀과의 전쟁이 시작되는 여름은 아침과 오후로 잠시 일하며 더위를 피하고, 수확의 계절 가을에는 황금빛 들판의 나락과 밭곡식을 거둬들이기에 눈코 뜰 새가 없고, 드디어 시작된 겨울에는 한 해 동안 먹을 김장과, 된장, 고추장을 담아야 겨울 준비가 끝난다.

철마다 먹을 것이 넘쳐나고 꽃이 피고 지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며 절로 철이 든 것이다. 특히 농촌의 겨울은 얼마나 정겹고 따뜻한지 도시에서는 전혀 느끼지 못하는 즐거움이 있다.

겨울을 알리는 가장 중요한 일은 김장이다. 시골에서 김장은 혼자 하는 법이 없이 품앗이로 함께 한다. 도시에 있는 자녀들에게 보내려고 양이 많아서 그렇기도 하지만, 함께 하는 즐거움을 예부터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 귀농했을 때는 어머니들 집을 돌아다니며 김장을 하고, 얻은 김치가 큰 통으로 네 개나 되었다. 다 먹지도 못해 나도 친정으로 김치를 보내기도 했다. 이후에는 요령이 생겨 조금만 얻어 오지만 귀농 17년이 지난 올해도 여전히 김치통이 세 개나 된다. 배추김치만 있는 것이 아니다. 파김치, 고들빼기김치, 갓김치, 알타리무김치까지 조금씩 맛보라고 주시는데 그 양이 혼자 1년 먹을 양이다.

전라도 김치는 젓갈이 많이 들어가고 온갖 양념이 많이 들어가는 특색이 있는데, 김장할 때 수육과 함께 척 걸쳐 먹는 김치는 그야말로 최고의 맛이다. 거기다 막걸리 한 잔하면 바로 여기가 천국이다.

몇 해 전부터 오전에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 나서 김장을 도와 드리는 일이 주말 외에는 힘들었는데, 어머니들이 꾀를 내어 늘 아침에 시작한 김장을 오후에 시작하셨다. 모든 양념과 절인 배추까지 준비해 가서 버무리기만 하는데도 젊은 각시가 오면 좋아하신다. 잠시 일하고 고맙다 인사 듣고, 김치 얻어 오고 세상에 이만한 즐거운 일도 없다.

김장뿐만 아니라 고추장과 된장을 담았는지 물어보시고, 안 담았다고 하면 그저 퍼 주신다. 마을회관 김장 50포기를 마치고 나면 모든 마을 김장이 끝난다. 김장이 끝나고 나면 이제 마을회관에서 따뜻하게 지낼 일만 남으셨다. 화투도 치고, 옛날 젊은 시절 농사짓던 이야기도 나누며 하루를 함께 보내신다. 투닥투닥 싸우기도 하고 큰소리도 나지만 다음날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정다우시니, 이게 사람 사는 맛 아니겠는가.

시골의 넉넉한 인심은 사는 맛이 절로 나게 하고 철마다 농사일이 있는데도 왜 젊은 사람들은 도시로만, 도시로만 가는지 모르겠다. 청년들이여 겨울이 외롭고 추운 도시빈민으로 살지 말고 따뜻하고 정겨운 시골 마을로 오시라! 시골에서의 삶은 몸은 좀 고달파도 절로 철을 알고 인심이 넘치니 사람살이가 이 정도면 족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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