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무의 동무는 동무아닙니까?”

  • 입력 2023.12.24 18:00
  • 수정 2023.12.24 19:05
  • 기자명 이광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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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범이는 숯불 위에 고기를 얹어 구우며 연신 왕소금을 뿌렸다. 아내 이씨가 자리보전한 뒤로 음식 솜씨가 늘어 하는 양이 퍽 자연스러웠다. 구워진 고기를 안주 삼아 동무들은 계곡에 담가둔 탁주를 꺼내 들이켰다. 기범이가 뒷집 동무를 초빙했다길래 혼전이라 부모 눈칫밥을 먹는 원정마을 동무들은 그냥 가겠다 하였으나 조금만 있어 보라고 해서 남게 되었던 것이다. 사위가 어두워져 모기가 날아들자 억구지가 생솔가지를 꺾어 모깃불을 피웠다.

“안 올 모양인데? 우리만 배 터지겠구나.”

박치수가 엄재로 통하는 소로를 돌아보았다.

“무에 걱정인가? 나누어 가지면 되지. 다음에는 백가네 소를 잡어다 실컷 먹고 순창이든 고부든 내다 팔자구.”

억구지는 재미가 들었는지 신나 떠들었다. 기범이가 그 말을 반가워하였다.

“작것, 그 집 살림을 다 들어내자구. 그나저나 오겠다구 큰소리치더니 정녕 안 올 셈인가? 그리 안 보았더니 허망한 놈일세.”

그들이 수작을 하며 탁주를 들이켤 즈음 숯막으로 뚫린 조도에 두런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병호가 나타나는데 혼자가 아니었다. 팔 척은 너끈한 거한이 술통개를 멘 채 따라오고 풍신 좋고 젊잖아 뵈는 사내가 뒤에 붙어왔다.

“내가 먼저 소개를 해야겠네그려.”

병호가 소개를 할 참에 희옥이가 나섰다.

“뭘 소개를 그리 하나. 각자 알아서 밝히면 되지. 난 송희옥이고 좋은 자리가 있다길래 전주 봉상에서 왔습니다.”

시원시원한 희옥이의 말에 필상도 자기를 밝혔다.

“금구 김필상이외다. 호방한 분들 뵙기가 꿈이더니 소원을 이룹니다. 반갑소.”

병호도 기범이의 동무들에게 이름을 밝혔고 뒤이어 기범이가 나이와 이름을 댔다. 억구지가 받았다.

“저는 억구지라고 하는데 기범이와 소꿉동뭅니다. 듣기 거북하실지 몰라도 백정의 자식이올시다. 그렇잖아도 내려갈 참인데 불편할까 싶으니 시방 가겠습니다.”

“그런 인사는 없습니다. 동무의 동무는 동무 아닙니까? 가더라도 좀 놀다 가십시다.”

병호가 손사래를 쳐서 말막음하자 마지막으로 박치수가 자기를 소개했다. 생각보다 입이 많아져 기범이는 숯을 넓게 벌리고 부지런히 고기를 구웠다. 처음에는 서먹서먹하였으나 몇 순배 술이 돌자 웃음이 피고 목소리들이 커졌다.

“내가 봉상에서 내려올 적에 엄재로 오라길래 전주 남문을 거치지 않았습니까? 구이동을 지나다 목이 말라 시암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빨래하던 아낙들이 대갓집에 불이 나고 돼지 한 마리가 없어졌다고 수런댑디다. 벼라별 숭악한 놈들두 다 있구나 하였지요. 그런데 이 고기는 어디서 왔는지 천하일미로구려.”

희옥이의 너스레에 분위기가 썰렁하였다가 우하하 웃음보가 터졌다. 숫자가 많아 이야기는 중구난방이었고 술잔도 빨리 돌았다. 밤이 깊어가고 술동이가 비자 희옥이가 지고 온 술통개를 풀었다. 그쯤에서 억구지와 박치수가 내려가겠다 하여 다음에 만나자 배웅하고 보니 그제야 자리에 여유가 생겼다.

“여기 필상 형님은 나보다 십 년 연상이니 기범이하고는 팔 년 층하가 지겠구먼. 허구 희옥이는 나와 동갑이니 두 살 아래일세. 내야 기범이와 트기로 하였으니 두 사람은 알아서 타협을 보시게.”

병호가 희옥이와 기범이의 갈래를 타려고 제각각의 나이를 밝혔다. 기범이나 희옥이는 당사자라 어쩌겠다 말을 못하는데 필상이 나섰다.

“병호 아우가 트고 지내는데 희옥이 아우가 형님 동생 하면 볼만하겠구먼.”

“제기랄, 동무 한번 잘못 텄다가 토끼란 토끼는 죄 덤비겠습니다. 다 내 잘못이니 트지 뭘. 어 참, 오늘은 술이 왜 이리 쓰누?”

기범이가 허허 웃자 희옥이가 술을 치며,

“동무라 하더라도 버르장머리 없는 짓은 안 하겠소. 한잔 비우고 들어보소.”

그러더니 어디서 배웠는지 권주가 한 자락을 뽑았다.

 

한잔 먹세 그려 또 한잔 먹세 그려

꽃 꺾어 산 놓고 무진무진 먹세 그려

이 몸 죽어지면 지게 우에 거적 덮어 줄 이어 매어가나

유소보장(流蘇寶帳)에 만인이 울어 예나

어욱새 속새 떡갈나무 백양 숲에 가기 곧 가면

누른 해 흰 달 가는 비 굵은 눈

소스리 바람 불 제 뉘 한잔 먹자할꼬

하물며 무덤 위에 잔나비 파람 불 제 뉘우친들 어이리

 

질그릇 부서지는 소릴망정 듣기에 그럴싸하여 박수가 나오고 환호성이 터졌다. 답가 삼아 병인년 이야기를 들려 달라는 희옥이의 재촉에 필상은 부끄러운 중에도 강화도의 일을 풀어헤쳤다. 희옥이나 병호는 벌써 들은 이야기건만 손에 땀을 쥐었고 기범이는 처음이라 눈을 희번덕거렸다. 처음에는 중치막 차림인 필상을 샌님인 줄 알고 우습게 알았지만 이야기를 들을수록 의젓하고 커 보여 기범이는 과연 형님으로 모실 만하다 여겼다.

“봄에는 호서에 있었는데 다시 이양선이 강화도를 침범했다 들었네. 병인년 때처럼 본진을 작약도에 차리고 들이닥친 모양이야.”

이야기 끝에 필상이 낯을 흐렸다. 소문은 삽시에 산골까지 닿았는데 이번 이양선은 미국에서 왔으며 광성보에서는 큰 전투가 벌어졌다고 했다. 그러나 필상이 낯을 흐린 것은 나라일도 일이려니와 다금발이 때문인 듯했다.

“대체 양이들은 왜 바다를 건너 예까지 쳐들어온답니까?”

수염에 탁주 방울이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기범이가 소리를 돋웠다.

“병인년 양이들은 죽은 신부의 복수를 하러 왔다는데 이번에는 통상을 요구했다 들었네.”

“통상을 하면 하는 게지 왜 사람은 죽이고 지랄이여. 장돌뱅이가 이 산골 저 산골 돌아다니는 게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무슨 놈의 통상을 사람까지 도륙하면서 하냔 말이우? 살다살다 희한한 장사치를 다 봅니다.”

모깃불이 사위어가자 핏대를 세우던 희옥이가 생솔가지를 잘라 살려놓았다.

“그나저나 왜국은 양이들에게 손을 들었는데 조선은 이만이나마 버티고 있으니 잘하는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노무 시골에선 까막눈이 따로 없습니다.”

기범이의 말을 병호가 받았다.

“통상을 하면 서로 득을 봐야 하는데 사람을 죽이면서까지 하자는 일에 무에 득이 있겠습니까. 저들이 바다를 건너 저리 그악스레 구는 걸 보면 이문이 크다는 소리겠지요. 하지만 한쪽 이문이 크면 다른 쪽은 손해입니다. 저쪽의 법도는 이문만을 따지는 모양인데 사람을 죽이든 산천을 뭉개든 이문만 챙기면 된다는 무뢰한들이 천하를 삼킬 기셉니다. 문둥이 콧구멍의 마늘씨까지 빼먹자는 수작 아닙니까? 저들이 천하를 주름잡으면 그런 세태가 골수에 박혀 아비규환의 지옥도가 펼쳐질 겝니다. 연전에 말씀하신 서학 책자는 아직 못 구하셨지요?”

말을 마친 병호가 필상을 주목하였다.

“나라의 눈이 삼엄하여 서학의 무리는 모조리 머리를 감추었네. 그러나 찾아내야지. 세상 도는 이치를 알아야 무엇이든 할 게 아닌가.”

그때 고의춤을 풀고 돌아선 희옥이의 오줌발 소리가 나각소리처럼 들려왔다.

“희옥이 아우는 어서 장가를 들어야겠구먼. 엉덩이가 실한 시악시를 골라야겠어.”

세 사람이 키득거리며 좋아할 제 저를 놀리는 줄도 모르고 당사자가 다가왔다.

“이렇게 둘러앉아 술타령을 하자니 꼭 산적 같구려. 예가 양산박 아니겠소?”

“그렇다면 일장청(一丈靑) 같은 여장부가 필요하겠네그려.”

필상이『수호전』에 나오는 호삼랑(扈三娘)의 별호를 언급하자 병호와 기범이는 죽는다고 웃었다. 희옥이가 아직도 영문을 몰라 눈을 껌벅일 적에 기범이가 웃음기를 걷어냈다.

“산적이 아니라 역적모의가 떠올라 아까부터 나는 팔뚝에 깨알이 돋습디다.”

잠시 말이 끊겼지만 필상이 나서서 수습하였다.

“그러면 기범이 아우가 임금을 하시려나?”

그 소리에 사람들이 흐흐흐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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