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명카수’가 되는 길① `먼 훗날' 꼭 가수가 되고 말 테야

  • 입력 2023.12.17 18:00
  • 수정 2023.12.17 18:52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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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이상락 소설가

1960년대 말쯤, 시골의 어느 남자 중학교 교실의 점심시간 풍경을 구경해보자.

-에, 그러면, 20일 동안의 동남아 순회공연을 마치고 김포공항을 통해 어제 막 귀국한 대한민국 최고의 명카수 김달수의 노래가 있겠습니다!

자칭 오락부장이 책받침을 동그랗게 말아서 마이크 삼아 들고는 호들갑을 떤다. 학생들은 손뼉을 치거나, 도시락 뚜껑을 두드리거나. 혹은 휘파람을 불면서 환호한다, 김달수가 책받침 마이크를 건네받고는 큼큼, 목청을 다듬더니 한껏 감정에 겨운 목소리로 노래를 시작한다.

-‘삼각지 로타리엔 궂은비는 오는데 / 잃어버린 그 사람을 아쉬워하며…’

김달수가 오만상을 찡그려가며 배호의 목소리를 비틀어내는 사이사이로, 청중인 학생들은 책상을 두드리며 ‘빠바바바 밤빰’ 따위의 추임새로 호응을 한다. 흥이 오른 김달수가 아예 책상에 올라서서는 ‘비에 젖어 한숨짓는…’ 그 대목을 부를 찰나에 드르륵 문이 열린다.

-야, 이놈들아! 시작종 쳤는데 지금 뭐 하고 있는 것이야! 김달수 이놈, 앞으로 나와! 지난 중간고사에서 수학 점수는 고작 20점을 받은 주제에…부모님은 너 공부시키겠다고 뼈 빠지게 고생하는데, 도대체 이 담에 커서 뭐가 되려고 그래! 손바닥 내밀어!

손바닥에서 불이 난다. 하지만 아이고, 아야, 엄살을 부리면서도 또박또박 이렇게 대답한다.

-저, 이 담에 커서 가수가 될 거라고요. 명카수요!

아이들이 폭소를 터트린다. 옛 시절, 어느 지역 할 것 없이 초등학교 고학년이나 중학교 교실에는 이런 학생이 꼭 한두 명씩은 있었다. 물론 그중에는 뒷날 하다못해 노래방이라도 운영함으로써 자신의 소질과 관련 있는 일을 생계로 삼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저 소싯적의 치기 어린 추억으로 간직하고 평범한 시민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정말로 소년 시절에 소망하던 ‘명카수’가 되어서 “이 담에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느냐”던 담임 교사의 꾸중을 보기 좋게 비웃어 버린 사례도 있었다.

1959년의 어느 날, 전라도 광주의 한 국민학교 5학년 교실에서는 음악 실기시험이 한창이었다. 곡목은 자유로이 선택하라 했으므로 아이들은 한 사람씩 앞으로 나가서 ‘오빠 생각’이나 ‘고향 땅’ 등의 노래를 정성을 다해 불렀다. 이윽고 김청자라는 여자아이의 순서가 되었다.

-선생님, 젤로 자신 있는 노래를 골라서 부르라고 했지요이. 시방부터 부르겄습니다이. ‘보기만 하여도 울렁 / 생각만 하여도 울렁 / 수줍은 열아홉 살 움트는 / 첫사랑을 몰라 주세요…’

“그때 이미자의 ‘열아홉 순정’이 막 발표돼서 인기 최고였거든요. 애들은 박수를 치고 난리가 났지만 선생님은 노발대발했지요. 배꼽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음악 시험을 보는데 유행가를 부른다고…. 당시엔 국민학생은 물론이고 중고생들도 유행가를 부르면 되바라졌다고 손가락질을 했어요.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은방울 자매의 ‘마포종점’이며 한명숙의 ‘노란 셔츠의 사나이' 같은 노래를 늘상 흥얼거리고 다녔어요. 그랬으니 학교 성적은 영 아니었지요.”

여기까지만 듣고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부른 히트곡 중의 하나를 소개하면 장년층은 어렴풋이나마 가수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행여나 날 찾아왔다가 못 보고 가더라도 / 옛정에 매이지 말고 말없이 돌아가 주오 / 사랑이란 그런 것 생각이야 나겠지만 / 먼 훗날 그때는 이 사람도 떠난 후일 테니까

‘먼 훗날’이라는 제목의 이 노래를 부른 가수는 1946년생 김미성(본명 김청자)이다. 사람들이 ‘딴따라 판’이라고 낮춰 불렀던 연예계에 그녀는 열일곱 살 때 처음 발을 들여놓았다는데, 가요 팬들에게 김미성이라는 이름 석 자를 알릴 수 있었던 것은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서른일곱 살 때였다. 그렇다면 그 20년 동안 무명 연예인이었던 김미성은 무얼 하며 어떻게 지냈을까?

그 시절 우리들의 우상이었던 뽕짝, 혹은 트로트 가수들은 어떤 경로를 거쳐서 대중 앞에 세워지고 또 단련되었을까? 김미성, 그녀가 걸어온 길을 함께 더듬어 보면 그러한 질문들의 답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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