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농촌에 가는 마음의 거리

  • 입력 2023.12.17 18:00
  • 수정 2023.12.18 16:15
  • 기자명 신수미(강원 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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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수미(강원 원주)
신수미(강원 원주)

지난해 어렵게 정식으로 임대차계약서를 작성한 농지와 내가 사는 곳의 거리는 20km가 훌쩍 넘는다. 후계농업인 자금을 대출받아 사려고 염두에 둔 농지는 좀 더 가까운 곳에 있지만 역시 20km를 조금 넘는 거리에 있다.

1996년 농지법이 시행되면서 폐지된 통작거리가 20km였다. 왜 20km였을까 나름 생각한 결과, 그만큼이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마음의 거리였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 22km 정도 떨어진 곳의 농지를 보고 오니, 먼저 다니던 곳은 꽤나 멀게 느껴졌다.

농민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오고 가던 때에, 동네에 살지 않고 출퇴근 하는 농민들에게 농민수당을 주는 것이 적절한가라는 얘기를 들었다. 영농하는 농지가 있는 마을에 거주하는 사람만 농민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얘기도 나왔다. 외국에선 농지를 상속할 때 상속 대상 중 경작자만 상속할 수 있도록 규정한 경우가 있는데, 우선순위를 정할 때 통작거리 내 거주하는 사람을 우선으로 하는 사례도 있다고 한다. 근거리에 살며 그 농지와 관련된 영향을 받는 사람이라고 인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 도시 지역에서 출퇴근하는 나는 속으로 움츠러든다. 농촌마을에 살지 않는 사람인 나는 자격이 있는 걸까 묻게 되고 왠지 모르게 위축된다.

농사를 짓겠다고 한국농수산대를 들어갔고, 졸업을 하고 나면 당연히 견학을 갔던 농장의 선배들처럼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6년 동안의 농장운영계획까지 졸업논문으로 제출했지만 나는 바로 농촌마을로 들어가지 못하고 왔다 갔다 했다. 먼저 농사지으러 고향으로 돌아간 한농대 남성 졸업생들은 여자 혼자 농사지으러 내려오면 미친 사람 취급 받는다며 말렸다. 그리고 나 역시 농촌의 현실을 알아 갈수록 혼자 내려가 살 결심을 하기가 더 어려웠다. 귀농선배이자 든든한 벗이었고 먼저 강원도에 정착한 한 언니는 이미 다 큰 아이들이 있었고 적지 않은 나이였지만 혼자 사는 ‘여성’이었기에 겪어야 했던 일들을 얘기해 주었다.

강원도로 내려올 결심은 농촌마을이 아닌, 도시지역에 살기로 생각을 바꾸고 나서야 가능했다. 나 역시도 통작거리 안에 살아야 농민일 것 같았다. 버려진 농가주택을 구해 쓸 만하게 개조해 살며, 텃밭에서 나는 채소들로 음식을 만들고, 마을회의에 나가고, 필요하다면 사무장을 하면서 오지랖을 부리고 싶었다. 잔소리만큼 정이 많은 귀여운 할매들이 나눠주는 음식을 얻어먹고, 그녀들의 옛날 얘기를 듣고, 토종종자를 모으러 다니면서 도시에서 꿈꾸던 진짜 시골살이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혼자 사는 여성의 그런 로망이 실현될 수 있는 농촌마을을 찾아내기는 어려웠다. 그 꿈을 위해 견뎌야 할 몇 가지 다른 일들에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농촌마을에 들어가는 것을 포기하고서야 농사를 지으러 내려올 수 있었다.

사람들은 말한다. 농촌도 많이 바뀌었고, 외지인들이 많이 들어와서 예전 같지 않고, 내가 너무 예민하고 따지는 게 많은 것이라고. 하지만 혼자 사는 여성이 견뎌야 할 시선과, 들어도 못들은 척 지나쳐야 할 얘기들은 도시의 익명성에 익숙한 나에게는 큰 두려움이었다. 우리 사회에서 남편이든 아버지든 형제든 아니면 삼촌이라도, 남성이라는 울타리가 없이 사는 여성이 겪어야 하는 어려움이 농촌에서는 더 부각돼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농촌마을에서 살아야 진짜 농민이라는 말에 내가 움츠러드는 것은 나의 이러한 선택이 도망친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농은 마을로 들어가서 살았어야 완성되는 것인데, 나는 중도에 포기하고 편한 길을 선택한 사람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아니야! 이런 방식으로도 농촌을 사랑하고 농사를 짓는 사람이 있어야 더 많은 사람이 함께 할 수 있어!’라고 생각을 고쳐먹지만, 나는 종종 자신감이 없어지곤 한다. 새로운 곳에 땅을 구하고 내 농장을 만들어가기 위한 일들을 하나씩 해가고 있는 요즘, 한농대를 졸업하면서 했던 고민과 강원도로 내려오기 직전에 했던 고민들이 다시 떠올라 심란하다. 그렇다고 뭐 다른 답이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일도 조금씩 농촌으로 가는 거리를 줄여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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