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부자놈을 징치하려는 게여”

  • 입력 2023.12.17 18:00
  • 수정 2023.12.17 18:53
  • 기자명 이광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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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묻는 할머니에게 기범이가 대답했다.

“계축생이니 올해로 열아홉입니다.”

“병호하고 두 살 층하가 지는구먼. 형 노릇도 어려운데 잘 봐주시우.”

“알아서 살피겠습니다.”

기범이는 부러 크게 답하였고 할머니가 다시 물었다.

“부모님은 다 계시고?”

“어릴 적에 돌아가셨습니다. 장형님 댁에서 자랐고 혼인하구서 갈렸습니다.”

“농사짓는 손이 아니니 과거를 생각하는 게지. 병호랑 떡하니 붙어서 집안도 일으키고 입신도 허도록 하우.”

“할머니 뜻대로 하겠습니다.”

식사를 끝내자 병호가 밥상을 들고 나갔다. 기범이가 따르는데 할머니의 한 마디가 들려왔다.

“끼니때 한 그릇 더 차릴 게니 그리 아시우.”

“알겠습니다.”

기범이는 집에 돌아와 맛나게 끽연하고 곰방대를 간수하였다. 삽짝 안으로 들어서는 병호에게 그가 대뜸 물었다.

“너 술은 마실 줄 아니?”

“남들만큼 마신다.”

“그럼 이담에 한잔하자. 동무들과 어울리는 숯막이 있는데 게서 보면 되겠다. 그믐날 어때?”

기범이는 구이동면의 인심 고약한 부잣집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서너 달 전에 돼지가 새끼를 낳았는데 딱 좋을 거라며 고향 마을 동무가 속삭였었던 것이다.

“그러자.”

녀석의 선선한 응대에 그냥 하는 대답인지 정말 응할 생각인지 기범이는 두고 볼 작정이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이튿날 원터마을에 건너가 이씨의 병세를 확인한 그는 돌아오는 길에 원정마을 동무들을 만나 머리를 맞댔다. 그 자리에서 그믐 전야에 일을 벌이기로 모의한 뒤 약속한 날을 기다려 그는 엄재를 넘어갔다. 기범이의 동무 한 녀석은 메겡이와 마대자루를 들었고 다른 녀석은 구럭을 지고 있었다.

“닭서리나 하면 그만이지 무슨 돼지서리야?”

북쪽 길을 골라잡으며 박치수가 물었다. 전답이 조금 있지만 기범이네 장형에게 따로 논을 부쳐 먹는 집 아들이었다. 그는 기범이의 장형이 초빙한 훈장 밑에서 나란히 글을 익힌 적도 있었다.

“그깟 참외서리 닭서리로 흥이 날까? 사내가 셋인데 돼지는 잡아야지. 게다가 백부자는 너한테 원이 서린 집이잖아.”

쇠백정 아들 억구지가 메겡이를 둘러메며 박치수에게 물었다.

“부시랑 섶은 잘 챙겼지?”

“잘 챙겼으니 자네 일이나 똑바로 히여.”

기범이가 원정마을 살 때만 해도 이들은 밤마다 떼지어 몰려다니던 사이였다. 기범이의 장형은 경서를 읽어 동생이 과거에 들기를 원하였고 고지기나 백정하고도 어울리는 성정을 염려하였다. 그러나 병서에 재미를 붙이고부터 그는 부쩍 재인 백정 가리지 않고 죽만 맞으면 일을 만들고 다녔다. 그러다 지금실로 떠난 뒤 행각은 잦아들었지만 백부자네 이야기가 나와 벼르던 길을 나선 참이었다. 대덕동을 지나자 들이 넓어지고 어둠에 잠긴 구이동 남쪽 마을이 자취를 드러냈다. 마을로 들어서자 개들이 짖어 하는 수 없이 야산에 앉아 숨을 골랐다.

“새로 사귄 친구를 대접하려고 이리 나서는 걸 보니 마음에 쏙 들었는갑다.”

박치수가 뇌까리자 기범이가 맞대응하였다.

“백부자놈을 징치하려는 게여. 네눔 원수도 갚구.”

그들이 고누고 있는 백부자 집은 작년 그러께에 삼십여 간 집을 지었지만 민재(民財)를 우려내고 민력(民力)을 침학하여 이룩한 일이었다. 진사라고도 하고 어느 고을 이서 노릇을 했다고도 하는 백부자는 지방의 하리들과 짜고서 백성의 재산 앗기를 솔개 병아리 채듯 일삼았다. 그는 원납전을 배분할 적에 향회라 칭하면서 부민에게 뇌물을 받고 갑리(甲利)로 빚을 주어 백성의 자잘한 농토까지 거두어들였다. 눈에 거슬리는 자는 사사로이 붙잡아 매를 치고 나라의 역위답(驛位沓)까지 늑매하여 경영하는데 어찌하여 무단토호를 징치할 적에 대원군의 눈을 비껴갔는지 모른다고 사람들은 숙덕이며 고까워하였다.

그러나 김기범 일행이 백부자를 더욱 미워하게 된 것은 풍 맞고 떨어진 그를 위해 박치수가 짝사랑하던 처자를 동녀(童女)로 데려간 때문이었다. 빚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팔려 간 처자를 두고 밤마다 술 취해 날뛰는 친우 때문에 동무들이 여간 고생한 게 아니었다. 풍 맞은 백부자는 고자가 되었으니 여인은 소실도 아니요, 발가벗고 산송장 몸이나 데우다 그가 죽으면 노비 취급을 당할 팔자였다.

“짚눌에 불을 놓았는데 본채에 옮겨붙으면 어쩌지?”

억구지가 걱정하자 기범이가 등을 두드리며,

“그러면 더 좋지. 싸그리 타버렸는데 제깟 놈들이 어쩔 게야.”

하더니 박치수를 보았다.

“만일 그리되거든 넌 여자를 데리고 줄행랑을 쳐버려. 가자!”

백부자네가 땔감으로 쌓아둔 담장 안 짚눌은 밥 짓고 구들 데우느라고 한쪽이 허물어져 반쯤 남아 있었다. 억구지가 둘러보고 와서 아무도 없다고 일러준 후 기범이가 섶에 부시를 쳐 담장 너머로 던졌다. 연기가 오를 무렵 골목을 나와 마을 어귀로 옮기면서 기범이가 외쳤다.

“불이야! 불이야! 백부자네 집에 불났다!”

짚눌에서 솟아오른 불꽃이 혓바닥처럼 일렁이자 조용하던 마을이 삽시에 깨어났다. 불이 백부자네에서 난 것을 확인한 사람들은 횃불을 밝히고 동이를 찾아 시암의 두룸박을 건져 그 댁으로 달려갔다. 마을 사람들이 백부자네로 몰려간 것을 본 세 사람은 불이라도 끄러 온 사람마냥 꽁무니에 붙어 골목으로 들어갔다. 백부자네 대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사람들은 그 집 우물에서 두룸박을 건지는 한편 마을 시암에 나가 물을 퍼 날랐다.

기범이가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두 동무가 성큼 따라왔다. 돈사는 대문 옆 행랑채 끝에 있었으며 담장 대신 판자를 지르고 밑에 구유가 놓여 있었다. 축사는 세 칸인데 첫째 칸은 어미 돼지와 새끼 몇 마리의 차지요, 다른 칸에는 나머지 새끼들이, 마지막 칸에서는 불안해진 소가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기범이는 돈사 앞에서 망을 보고 억구지와 박치수가 둘째 칸 간짓대를 들추며 안으로 들어갔다. 돼지는 시력이 약한 놈들이라 사람이 들어와도 알아보지 못하고 저만 들키지 않은 걸로 알아 죽은 듯이 엎드려 있게 마련이었다. 날 잡아잡수 하는 꼴인데 오륙십 근 되는 놈의 인중을 겨냥해 억구지가 메겡이를 휘둘렀다. 역시나 백정 아들놈의 솜씨인지라 단매에 끽소리 못하고 뻐드러지는 놈을 박치수가 마대자루에 집어넣고 훌쩍 둘러멨다. 마대자루 진 놈과 메겡이 든 놈, 구럭을 진 놈이 대문을 나설 때까지 사람들은 누구 하나 신경도 쓰지 않았다.

“제에미, 저깟 놈 집에 불 좀 났다고 저렇게 뛰어다닐 건 뭐람.”

기범이의 씹어뱉는 말에,

“그래도 인심이 어디 그런가? 이럴 때 잘 보이지 않으면 소작 떨어진다구.”

하고서 박치수가 돌아보는데 빚에 팔려간 처자를 떠올리는 눈치였다. 그들이 동구를 빠져나온 후에도 불길은 담장 넘어로 넘실거렸고 냇내가 코에 닿았다.

“담에는 그 처자를 업어 내오자구.”

억구지가 흰 이를 드러내며 박치수를 쳐다보았다.

“다 지난 일이야. 이 고을엔 민란도 안 일어나나. 확 싸지르고 죽어버릴 건데.”

하운면까지 내려와 일행은 운암강 자갈돌에 마대자루를 부렸다. 두 사람이 다리 두 짝을 잡고 발버둥치는 돼지를 감당할 적에 억구지가 자루에서 칼을 꺼내 멱을 찔렀다. 멱따는 소리를 내며 발광하는 돼지의 목에서 피가 쏟아져 자갈돌 사이로 흘렀다. 피가 빠진 채 축 늘어진 돼지를 마대자루에 담고 그들은 강물로 자갈돌을 씻었다. 이제는 숯막으로 넘어가 털을 제거하고 발골을 할 예정이었다. 엄재 방면으로 향하면서 기범이는 이씨가 누워있는 처가 방면을 돌아보았다. 그녀를 두고 도축하는 일이 꺼림칙하였으나 머리를 내둘러버렸다. 마대자루를 멘 박치수도 자꾸 돌아보는 것이 팔려 간 처자를 생각하는 눈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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