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글징글하던 땡볕을 온몸으로 견디며 참깨 털던 기억이 어제의 기억처럼 아직 또렷한데 어느새 손발이 시린 계절이다. 예년 같으면 12월 중순까지 밭에서 종종걸음이었다. 끈으로 배추를 묶고 고랑에 마지막 웃거름을 뿌리기까지 해야 한 해 일감이 마무리된다. 올해는 웬일인지 이 지역의 겨울배추가 거의 다 계약재배로 바뀌면서 일감이 많이 줄었다. 농민은 배추 심고 물주는 관리만 하고 나머지 과정, 3회의 웃거름과 3~4회의 농약 그리고 끈으로 묶는 일은 상인이 해결했다. 상인은 또 그 일감을 다른 작업자들(외국인 노동자)한테 맡기는 형태로 분업화 시대의 조짐이 보인다.
배추는 생육 주기가 짧기 때문에 3개월 동안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일을 쫓아다니느라 딴 생각할 틈이 없다. 무게의 끝이 보이지 않던 등짐을 계약재배 덕분에 벗은 것 같다. 무엇보다도 불안감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어찌어찌해서 산 하나를 넘었다 싶으면 더 큰 산이 눈앞에 펼쳐지는 아득함이 아닌, 낯선 평지의 아늑함이 느껴졌다. 칼 물고 널뛰기 하는 농산물 가격 때문에 다 가꾼 농산물을 팔기 전까지는 하루도 불안하지 않은 날이 없었는데 모처럼 느긋함과 여유를 만날 수 있었다.
메주도 일찌감치 쒀서 처마 밑에 매달아 놓았고 들일하느라 미뤄두기만 했던 집안 청소를 차분하게 시작했다. 농사짓고 사는 고달픔 중 한 가지가 집안이 항상 헝클어져 있어서 일거리를 베개처럼 베고 잠든다는 것이다. 농사짓는 남성들 태반이 들일 할 때는 손을 보태자면서도 집 대문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손을 거둬들인다. 남편 또한 집안일은 금지의 영역으로 설정했는지 초심과 뚝심을 잃지 않고 일관성 있게 숟가락 들 때만 손을 사용한다. 새로 지은 집보다 깔끔하게 다듬어진, 뻑뻑해서 잘 열리지 않는 화장실 문짝을 방치하지 않는 손과 시간이 있는, 낡은 빨랫줄 교체마저 다음으로 미루지 않은 환경을 늘 그린다. 같이 사는 남편은 불편하지 않지만 불편함이 짜증으로 바뀌는, 내 고유의 일감이 대문 안 곳곳에 늘어져 있다.
몇 년 동안 입지 않아도 아까워 버리지 못한 옷이 가득 차서 장롱문이 늘 빼꼼 열려 있었다. 외출복 입을 기회는 몇 차례 되지 않고 아침에 눈 뜨자마자 눈곱을 매단 채 밭으로 내달려야 하니 철 따라 작업복 서너 벌씩이면 1년이 너끈하다. 예전에는 입었지만 몸집이 불어 입다가 뜯어질 옷들 때문에 방안이 늘 북새통이었다. 버리지 않으면 정리되지 않음을 몇 년 동안 실감하고 있던 터라 과감하게 입지 않은 옷가지들을 쓰레기 봉지에 담았다.
드디어 장롱이 헐렁해졌고 둘 곳이 마땅치 않아서 보자기에 싸뒀던 작업복들을 외출복처럼 옷걸이에 걸었다. 외출복보다는 작업복이 내게는 쓰임새가 많은데 그동안 너무 허투루 다뤘다. 1년에 한두 번 보는 피붙이보다 동고동락하는 이웃을 함부로 대했던 것처럼. 작업복을 옷걸이에 걸어 놓으니 노동하는 내 모습이 당당하게 곧추세워지는 것 같았다. 옷에 흙 묻히지 않고도 경제활동 할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열패감이 장롱 속에서도 똬리를 틀고 있었던 모양이다.
조만간에 김장을 할 계획이라 김치냉장고 정리도 미룰 수 없다. 김치 통이 비워지는 공간을 냉동고로 활용하기 때문에 김치냉장고 안의 내용물이 다양하다. 늦가을의 단감도 냉장고에서는 금세 물러지는데 김치냉장고에 넣어두면 설날까지 아삭하게 먹을 수 있고, 집에서 만든 조림간장이나 사골국까지 한 달 넘게 맛이 변하지 않는 장점이 있다.
시간에 쫓기지 않고 정리 정돈을 해 놓은 집안을 훑어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수 없이 되뇌었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는 스스로 외부 환경을 바꿀 수 없을 때 하는, ‘체념 학습’의 다른 표현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