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의 눈보라, 그 절창 속에서

  • 입력 2009.02.23 08:00
  • 기자명 한국농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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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지요, 문 한번 열어 보소. 지금 엄청 쏟아지는 데요!”

간밤에 증조부 제사를 지낸 뒤 음복을 마치고 네 시가 넘어 잠자리에 들었다가 점심때나 되어 일어나서 아직 몽롱한 상태인데, 작은놈이 느닷없이 밖에서 외장치듯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틀째 학교에도 나가지 않고 농땡이를 치고 있는 녀석의 목소리에는 오랜만에 힘이 잔뜩 실려 있습니다.

겨울방학 내내, 그리고 봄방학까지 끊임없이 책 보따리를 짊어지고 학교에 나갔다 돌아오는 녀석을 보면서 늘 마음이 편치를 못했던 터이라 활기찬 목소리에 북창을 활짝 열었습니다.

방안으로 눈보라가 마구 몰아치고 있습니다. 나는 얼른 창을 닫고 밖으로 나가 하늘을 올려다보았지요. 캄캄하게 어두워진 하늘에서 사선으로 달려오는 눈발이 차갑게 얼굴을 때립니다. 장관입니다. 여기 영천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눈보라를 볼 수 있다는 건 차라리 행운에 가깝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태어나 이런 눈보라를 단 한 번도 보지를 못했습니다. 세상을 깜깜하게 지워버리고 그 짙은 어둠을 수억만 개의 눈보라로 밝히는 풍경은 가히 절경이고 절창입니다. 어느 시인은 절창은 시가 안 된다고 했지만 이 눈보라 자체가 엄청 감동적인 시 한편으로 내 가슴을 때리고 있습니다.

나는 추운 줄도 모르고 사정없이 몰아치는 눈보라를 맞으며 북국의 원주민처럼 걸어봅니다. 자작나무숲이 아닌 복숭아나무가 눈보라에 시달리느라 절박한 신음소리를 토해냅니다. 어느 순간, 산도 지워지고 마을도 지워지고 없는 세상으로 달려오는 눈발을 바라보다가 문득 흠칫, 어깨를 떨었습니다.

추위 때문이 아니라, 갑자기 김수환 추기경이 떠올랐던 까닭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그 분의 장례식이지요. 그 생각 끝에 마치 쏟아지는 눈발이 하늘에서 던지는 수만 가닥의 오랏줄같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눈발은 오랏줄처럼 나를 묶고 있습니다. 나는 눈발 오랏줄에 꼼짝없이 묶여 참담하게 서 있었지요. 작은놈은 어느새 방안으로 들어가고 보이지 않았습니다.

나는 담배를 꺼내 물고 처마 밑에 쭈그리고 앉아 있습니다. 눈발은 차츰 가늘어지고 서서히 하늘이 밝아옵니다. 십 분이 채 안 되는 하느님의 원맨쇼는 끝나버리고 나는 아직도 감동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관객처럼 심각한 표정을 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사나운 눈보라 속에서 왜 김수환 추기경을 떠올렸고 눈발이 오랏줄이 되어 내 몸을 묶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짧은 시간에 매서운 바람이 휩쓸고 가는 논바닥을 바라보며 달리 어떤 생각을 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굳이 궁색한 변명을 댄다면 오늘 잠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텔레비전에서 슬쩍 그 분의 영정을 보였고, ‘민주화’와 ‘인권’이란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눈보라치는 논바닥에서 ‘인권’이란 말을 떠올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세계에서 유일하게 우리나라에서만 ‘쌀’은 ‘인권’이라는 말과 통하기 때문이지요. 그렇지만 나는 굳이 ‘쌀’과 ‘인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 전에도 이런 이야기를 할라치면 많은 사람들은 너무 지나친 상상의 비약이거나 엄살, 풍자 정도로만 여겼기 때문입니다.

방으로 돌아와서 고등학교 2학년이 앉은 컴퓨터를 빼앗아 앉았지만 정신은 명징하게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녀석은 느닷없이 자리를 빼앗기고는 벌렁 드러누워 휴대폰으로 게임을 시작합니다. 나는 아들놈 방에서 담배를 두 대나 태우며 멍하니 앉았다가 간신히 정신을 수습하고 녀석의 옆구리를 툭 찹니다.

이 녀석은 가끔 제 엄마에게 농사나 짓고 싶다고 한다는데 오늘은 그것을 한번 확인해보고 싶어집니다.
“어이 고2, 너 농사지을래?”

녀석은 한번 힐끔 쳐다본 뒤 묘한 웃음을 입술 끝에 매달았다가 지우고는 말이 없습니다. 평소 일 하는 걸 보면 지금 농사를 지어도 괜찮을 것이란 생각은 있지만, 막상 나중에 저 녀석이 농사를 짓겠다고 우기면 그 기분이 어떨지는 아직 알 수가 없습니다. 나는 더 이상 물어볼 용기가 없어 어느 날 조용할 때 소주 한잔 하는 자리를 만들기로 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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