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랫집 사는 김기범입니다”

  • 입력 2023.12.10 18:00
  • 수정 2023.12.10 18:38
  • 기자명 이광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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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네가 가도 여름이 되면(1871)

금구 수류면 원평장터에서 닭뱀이재를 지나면 텃골이 나오고 돌무늬와 상두재를 넘으면 태인 지금실마을이 나타난다. 지금실마을은 상두산에 몸을 의탁했는데 마을 끝자락 탱자울을 두른 초가에서 한 사내가 약탕기를 걸고 부채질에 여념이 없었다. 사내의 이름은 김기범으로 태인 명문가인 도강김씨 가문의 일원이었다. 그러나 오래도록 급제자를 내지 못해 도강김씨가의 가세는 기운 지 오래였다. 그래도 오대조까지는 동약(洞約) 활동에 참여해 체모를 지켜오더니 행세할 조건을 잃은 채 집안은 몰락해가고 있었다. 그나마 김기범이 헛간 딸린 집을 마련하고 전답 몇 마지기를 보유하게 된 것은 순전히 장형의 배려 덕이었다.

족숙(族叔)뻘인 김시풍이 전주 영장(營將)을 지내고 있다지만 김기범은 집안이니 가문이니 그런 것에 당최 관심이 없었다. 그런 그가『수호전』이며『전우치전』같은 군담류 소설과 병서를 고리짝에 치우고 경서에 파묻혀 지낸 것은 구이동면 원터마을 처자와 혼인해 제금을 나면서였다. 부인 이씨가 그를 응원해 논밭을 관리하므로 그날로부터 김기범은 더욱 경서에 매진하며 시부를 지었다. 그런데 임신을 하였는지 자꾸 입맛을 잃어가던 이씨가 어느 날 하혈하고서 자리보전을 하더니 도통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용하다는 의원을 불러 진맥을 하고 침을 놓게 해도 차도가 보이지 않아 부지런히 탕약을 끓여 먹이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었다.

약 다린 물을 붓고 삼베 귀퉁이를 모아들자 약 우린 물이 사발에 고였다. 약재를 다시 탕기에 넣고 물을 부어 숯불에 얹었다. 약재마다 우러나는 시간이 달라 재탕하여 원탕과 섞어 먹이려는 것이었다. 그가 다시 부채질에 몰두할 즈음 작달막한 사내가 중년 사내를 앞세우고 삽짝을 지나갔다. 상두재를 넘는 사람인가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비어 있는 뒷집에서 두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비 새는 데가 없다는 둥 고래도 주저앉지 않았다는 둥 집을 품평하는 소리였다. 한참 후 사내들이 동곡마을 쪽으로 내려간 뒤 그는 재탕한 약을 원탕에 섞어 손가락으로 온도를 잰 후 방에 들여갔다.

“약 먹읍시다.”

등에 손을 넣어 이씨를 일으키는데 몸이 밭아 그녀는 허깨비처럼 가벼웠다. 시집올 때만 해도 둥그스름하던 턱은 각이 져 주걱처럼 변하고 눈은 꺼져 정기를 찾기 어려웠다. 이씨가 한 번에 비우지 못하고 약사발을 뗐다.

“그걸 한 번에 못 비우나? 입에 맞지 않더라도 주욱 들이켜소.”

그가 타이르자 이씨가 이번에는 끝까지 마셨다. 약사발과 함께 담아온 감초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던 그녀가 접시 달라는 시늉을 했다.

“원터마을에 좀 다녀오십시오.”

“처가에 말이오?”

“오라비를 모셔 왔으면 합니다.”

“처남은 왜?”

“겨울에 시집와서 일 년도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리 누워 있으니 죄스럽습니다. 친정에 가서 정양을 해야 수발하느라 애쓰지 않겠지요. 서방님은 원정마을에 가 계십시오. 이곳에서야 끼닌들 제대로 해결하겠습니까?”

“장성하여 떠나온 집으로 어찌 돌아간단 말이오. 어머니가 계시면 모를까 형수 밑으로는 들어가지 않을 것이오. 허나 원터마을에는 다녀오리다.”

기범이는 이불귀를 여며주고 나와 곰방대에 연초를 재웠다. 동곡마을에서 꾀꼬리가 날아와 사라진 후 상두산에서 꾹꾹구구 비둘기가 울었다. 마른하늘을 보며 그는 저도 모르게 웅얼거렸다.

“작것, 여름 해는 길기도 허지.”

이튿날 미음을 쑤어 이씨를 먹인 후 길 나설 채비를 하는데 전날 집을 보러 왔던 사내가 보퉁이를 지고 삽짝을 지나갔다. 이어 그를 닮은 녀석이 솥단지와 가재도구가 얹힌 지게를 메고 가고 보따리를 인 할머니와 어린 흰둥이까지 네 식구의 행렬이 이어졌다. 평소 져보지 않았는지 지게 진 녀석은 걸음걸이가 영 신통치 않았고 멜빵을 뺄 적에는 짐바리를 쏟을 것 같아 기범이가 얼른 잡아주었다.

“고맙수.”

지게작대기를 건 녀석은 그렇게 말하는 것이지만 고마워하기는커녕 퉁명스럽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녀석의 눈은 범 같은 김기범의 눈에도 예사로워 보이지 않았다.

“어서 짐을 내리지 않고서.”

아들에게 말하며 돌아서는 중년 사내의 눈이 똑 아들의 그것이었다. 이마가 도드라져 눈은 산사처럼 깊고 흰자에 싸여 검은자는 먹물보다 짙었다.

“아랫집 사는 김기범입니다.”

기범이는 중년 사내와 할머니에게 인사를 차렸으나 집안을 쓸고 닦는 일로 새 이웃은 분주하였다. 구경만 하기도 뻘쭘한 노릇이라 그는 앞에 놓인 부담롱 하나를 그러안았다. 옷가지나 들었으려니 하였다가 허리가 휘는 것 같아 부담롱을 부리고서 들춰보니 지필묵이며 경서가 한가득이었다. 마루를 훔치던 할머니가 부엌을 쓰자 하여 김기범은 집에 돌아와 화덕에 불을 피웠다. 잡곡이 든 솥을 들고 온 할머니가 집을 휘휘 둘러보더니 물었다.

“누구 앓는 사람이 있수?”

“안사람이 앓는 중입니다. 어찌 아십니까?”

“한약 냄새가 진동하지 않남. 아낙네 손이 닿지 않아 집안 썰렁한 것 좀 보시우. 집이든 사람이든 아낙네 손길을 타야 하는 법이라오. 잠깐 기다려보우.”

그녀가 삽짝을 나서더니 잠시 후 중년 사내를 데려왔다.

“내자가 편찮으시다는데 진맥이나 해봅시다.”

쥐덫으로 황소를 잡는대도 믿어야 할 판이라 기범이는 얼른 방문을 열었다.

“뒷집에 새로 오신 분인데 진맥을 하시겠다네.”

이씨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사내가 만류했다. 이씨의 손목에 손을 얹고 짚었다 떼기를 반복하던 사내가 한참 후 방을 나섰다.

“언제부터 누워계셨소?”

“지난봄에 하혈을 하더니 저러고 있습니다.”

“그래, 어쩔 생각이오?”

염려스러운 말투였으나 성정이 그런지 그이는 표정이 없었다.

“이따가 처가 쪽 사람을 데려올까 합니다. 친정에서 요양을 하겠답니다.”

“뜻대로 하게 해주시오.”

그러며 사내는 윗집으로 가버리는 것이었다. 기범이는 이씨의 증상에 관해 한 마디 언급도 하지 않는 사내를 불만스럽게 보고 섰다가 걸음을 돌려 원터마을로 향하였다.

이씨의 이야기를 듣고 이튿날 그녀의 오라비가 소달구지를 끌고 나타나 환자를 실어갔다. 원터마을까지 따라가 씨암탉을 대접받은 기범이는 하룻밤을 묵고 돌아와 이불 홑청을 뜯어 담그고 누비이불은 빨랫줄에 널었다. 그 일을 끝내고 누웠는데,

“안에 계시우?”

하는 소리에 내다보니 아비를 똑 탁한 뒷집 녀석이 서 있었다.

“할머니께서 같이 밥을 먹자 하십니다. 어디 밥이나 차려 먹겠냐고.”

“이거나 한 모금하고 갑시다.”

기범이가 곰방대에 부시를 치자 뒷집 녀석이 마루에 엉덩이를 걸쳤다.

“전병호요. 을묘생이구.”

“김기범이오. 내가 계축생이니 두 살 위구려. 제기랄, 동무합시다.”

그러자 녀석이 물었다.

“내자는 잘 안돈해드리구 왔나?”

기범이는 콧구멍으로 연기를 날리며 피식 웃었다. 아무리 먼저 동무하자 했어도 손사래 한 번은 칠 일이건만 냉큼 낚아 깨무는 배포에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제금 나온 뒤로 원정마을 동무들과도 떨어져 가뜩이나 좀이 쑤시던 참이었다. 이씨의 바람을 존중해 향시라도 치를까 하였지만 피가 식지 않아 세상이 시시하던 차였다. 그런데 부담롱 속의 필묵이며 경서를 보고 난 후로 가슴에서는 생원이든 진사든 먼저 들겠다는 결심이 불처럼 일어나던 것이었다.

“어서 오시우. 찬이 변변치 않구려.”

“폐를 끼치게 됐습니다.”

상에는 조 수수가 섞인 밥에 나물 두어 가지가 놓여 있었다. 그러나마 혼자 먹는 일에 물린 기범이에게는 회가 동할 일이었다.

“올해 몇인구?”

양반네란 상머리에서 함부로 말을 주고받지 않는데 할머니는 개의치 않았다. 하기야 이삿짐이며 집안 꼬락서니로 보아 양반네라 부를 형편은 이미 아닌 듯하였다. 기범이는 병호 아버지가 이씨의 맥을 짚었을 때 과거 공부로 허송이나 하다가 훈장 의원 나부랭이로 돌아쳤음을 대번에 짐작해버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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