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가 그이인가보이”

  • 입력 2023.12.03 18:00
  • 수정 2023.12.03 18:03
  • 기자명 이광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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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만에 다시 찾아온 희옥이와 학업에 몰두하다 밖에 나서자 송진사네 대문 앞에 필상이 서 있었다. 병호가 아는 체를 하였다.

“어찌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방구석에 누워 있댔자 별 수 있나?”

그러며 곁에 선 희옥이에게 필상은,

“이이가 그이인가보이.”

하고 반가워하였다. 정여립의 용마 무덤을 보고 금산사를 다녀온 후 그는 자주 병호를 찾았는데 이야기 끝에 희옥이에 관한 말이 나왔었던 것이다. 하지만 희옥이는 필상에 대해 들은 바가 없어 어벙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거야마을에 사는 사돈 형님이야.”

병호의 소개에 희옥이가 냉큼 허리를 굽혔다.

“전주 봉상 사는 송희옥입니다.”

“김필상이네. 병호 아우의 말을 듣고서 보고 싶어졌지. 자자, 우리 집으로 가세.”

논에는 어린 모가 몸살을 하고 볕을 쬐던 개구리가 사람을 피해 물에 뛰어들었다. 모를 때우는 사람만 눈에 띌 뿐 농번기 끝의 들판은 한가로웠다. 이물 없는 사이가 아니라서 필상에게는 말을 못 붙이고 희옥이는 병호를 보았다.

“오다가 전주에서 놀랄 일을 봤어.”

“무슨 놀랄 일?”

“동문 밖으로 중영(中營)을 지나는데 죄인을 실은 함거가 줄줄이 들이닥치지 뭐야. 무려 여섯 대나 되던 걸. 죄인들은 산발한 얼굴에 피딱지가 앉았는데 손톱마다 꼬챙이가 박혔드라구. 역모라도 났을까?”

병호는 묵묵부답인데 필상이 중얼거렸다.

“광양에서 올라온 게로구만. 목이 잘려 시구문에 버려질 테지.”

원래 민란 주동자들은 군현 단위에서 처결되는 게 상례였다. 수령의 탐학이 극에 달하면 참다못한 백성은 통문을 돌리고 청을 들어 달라 등소(等訴)부터 하였다. 이 경우 수령들은 몽둥이찜을 내리기 일쑤인데 백성은 관아에 돌입할 장정을 차출하고 여의치 않은 집에서는 벌전으로 대신하였다.

관아를 점령한 난민은 탐학한 수령과 아전을 멍석에 말아 지경 밖에 던지고 옥을 부숴 죄인을 방면한 다음 사창을 헐어 쌀을 나누어준다. 이웃 고을에서 소식을 장계에 실어 보내면 조정에서는 안핵사를 파견해 주동자들의 목을 치고 적극 동조한 십여 명은 유배하도록 처결한다. 또 분란을 조장한 수령과 이서들은 원악도에 유배하지만 이삼 년 지나면 해배되어 같은 짓을 반복하게 마련이었다. 결국 주림을 견디지 못해 일을 벌이면 군현의 똑똑한 놈은 목이 날아가고 말깨나 하는 자는 유배지에서 죽어 나가니 며칠 배불리 먹는 호사가 모두 이웃의 목숨값이었다. 하지만 이는 군현의 백성이 자체로 나선 경우에 한하고 광양에서는 다른 지역 인사까지 결합됐다는 소문이고 보니 명백한 변란이었다. 그런 이유로 주모자를 한양에서 처결하려고 압송하는 모양이었다.

거야마을 필상의 사랑에는 미리 일러두었는지 머리고기가 차려져 있고 호리병에 복지깨를 덮은 주발까지 놓여 있었다. 떠르르한 부자는 아니지만 물려받은 전답과 집이 있어 필상은 행랑방의 직수굿한 부부를 두고 궁상맞지 않게 살았다. 가산을 물려받은 필상이 전답을 나누어주며 나가 살라고 이르는데도 농사는 누가 챙기냐고 부부는 한사코 행랑채에 머물렀다. 그가 안심하고 전국을 주유하는 것이 다 그들 부부가 근실한 때문이었다. 소피를 보는지 필상은 소식이 없더니 한참 뒤 사랑 마당에 드는데 노랑 저고리에 남색 치마를 입은 여인이 따라왔다. 눈치를 챈 병호가 버선발로 뛰어내리자 희옥이가 쿵쾅대며 따랐다.

“아우들일세. 나 없을 때 찾더라도 박대하지 마시게.”

필상의 소개에 두 사람이 반절을 하자 여인도 허리를 숙이는 것이지만 흔연한 표정이 아니었다. 일 년 중 절반을 밖으로 도는 지아비가 떠받들 지경이 아닌 건 누구라도 짐작할 일이었다. 반찬을 안주 삼아 술을 비우던 희옥이가 구석에 세워진 물건을 가리켰다.

“저건 무어요? 좋아 보이는데.”

필상이 수발총을 가져왔다. 희옥이는 총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관심을 보였다.

“화승을 끼우지 않고도 쏘는 총입니다그려.”

“강화도에서 얻은 물건이지. 총 얻은 사연을 들어보려나?”

필상은 강화도에 건너간 일을 다른 사람 목소리까지 시늉하며 설명하였다. 그가 이양선을 입에 올릴 적에 희옥이는 눈을 뒤룩거리더니 김진사네가 피난 가는 대목에서는 방구들이 무너지도록 주먹을 쳤다. 반면 병호는 차분히 경청하면서도 서너 잔 술에 홍당무가 되어 몸이 비스듬해지는 중이었다.

“양이들은 어찌 그 같은 이양선과 총포를 갖추었을까요?”

병호가 필상에게 한 질문이건만 희옥이가 말을 채갔다.

“어디 이양선뿐인가? 종정마을 송진사가 쓰는 돋보기도 저들이 만든 거라네. 온갖 기물이 다 쏟아진다는데 뭘.”

“저들의 그러한 기물은 서학에서 나왔을까요?”

병호는 한층 더 기울어진 자세였다.

“이양선을 보았다 하나 만지지 못하니 이치는 알 수 없었네.”

“그 신통한 기물이 우리에겐 없고 저들에겐 있으니 마음먹기에 따라선 재앙이 되겠지요. 청국을 보십시오. 이양선을 타고 온 무리에게 도륙 나지 않았습니까?”

아편전쟁은 이들이 태어나기도 전 일이지만 귀 아프게 들은 이야기였다. 멀쩡하던 당산나무가 와지끈 소리도 못 하고 부러진 듯이 허탈하고 두려운 일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청나라가 이양선의 불법행위를 단속하자 양이들은 다시 침략하였는데 병호나 희옥이는 어려서 몰랐지만 필상만 해도 오줌 지리며 듣던 이야기였다. 양이들은 연경을 함락하고 황궁을 바스러뜨렸으며 황제까지 열하로 도망쳤다는 게 아닌가. 그 사건으로 청국은 구룡반도를 영국에 할양하고 연해주를 아라사에 내줘 졸지에 조선은 양이들과 두만강을 나눠 쓰게 되었다. 아라사를 막으려고 프랑스 신부들과 방아책(防俄策)을 숙의하다 일이 틀어져 대원군은 서학을 탄압하지 않았던가.

“저들은 다른 나라를 침범하는 일에 그 기물을 쓰는데 우리도 무언가 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상은 새로운 일이 생길 조짐으로 가득합니다.”

말을 하면서도 얼굴이 홧홧거려 병호는 눕고만 싶었다.

“아우님 말이 지당하네. 무작정 쏘다닐 게 아니라 그쪽에도 귀를 기울일 참이네. 서학쟁이를 소탕하여 다들 숨어들었지만 서적이라도 구하게 될지 모르지.”

필상의 말을 다 듣지 못하고 눈꺼풀을 깔던 병호가 픽 고꾸라졌다. 필상과 희옥이가 떠드는 소리를 들으며 까무룩 가라앉고 편한 자세를 찾느라고 뒤척이던 그가 한축이 들어 실눈을 떠보니 촛불에 그림자가 너울거렸다.

“여항의 선비 중에는 대원군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무리도 있다더구먼. 억강부약하는 기세에 겁을 먹은 게지.”

“까짓 거, 우리라도 총을 들어야 할까요?”

병호가 불침 맞은 듯 놀라 일어날 때까지 필상과 희옥이는 시국담을 잇고 있었다.

“어, 시각이 얼마나 되었지?”

“자고 가지 왜 일어나나?”

“아니올시다. 가야 합니다.”

밖에 나온 병호는 방안 불빛에 기대 미투리를 신었다.

“정말 갈 작정인가보네. 데려다주까?”

희옥이가 물었으나 괜찮다 하면서 병호는 서둘러 밖에 나섰다. 새로 이사 온 황새마을까지는 십 리 남짓이지만 그는 쫓기듯 수류면을 관통하여 뛰었다. 멀리서 맹꽁이와 개구리울음이 들려와 산 그림자가 그나마 덜 무서웠다. 숨이 턱에 걸려 보통 걸음으로 바꾸면서 병호는 어찌 이리 서두르는지 생각하였다. 그것은 아버지 기창과 스승 송진사의 바람이 자신 또한 원하는 길인지를 묻는 일이었다. 과거시험을 통과하면 가슴의 실타래가 잘려 나갈까. 그 일은 뜨거울까 무덤덤할까. 삼간초가 마당으로 들어서는데 안방에서 불빛이 새 나왔다.

“사돈댁에서 깜박 잠들었기로 늦었습니다. 차후에는 조심하겠습니다.”

그가 토방에 서서 말하자,

“어서 자거라.”

가래 끓는 소리가 들리더니 불빛이 사라졌다. 혼자 쓰게 해준 윗방에 눕고서야 병호는 예도 못 차리고 필상의 집에서 나온 것을 깨달았다. 안방에서는 아버지 기창이 잠을 이루지 못하는 기색이었고 병호도 잠이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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