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농가의 ‘소독종자’ 딜레마

유기농업자재지원사업 통한 ‘수입 소독 종자’ 보급, 당연한가?

  • 입력 2023.11.12 18:00
  • 수정 2023.11.12 20:58
  • 기자명 강선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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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강선일 기자]

전남지역의 유기농민 A씨가 농림축산식품부 유기농업자재지원사업을 통해 `지원' 받은, 시뻘건 색의 수입 소독종자를 보여주고 있다. 이 종자는 남아공에서 수입된 `윈터그레이저-70' 종자다.
전남지역의 유기농민 A씨가 농림축산식품부 유기농업자재지원사업을 통해 `지원' 받은, 시뻘건 색의 수입 소독종자를 보여주고 있다. 이 종자는 남아공에서 수입된 `윈터그레이저-70' 종자다.

유기농사의 원칙 중 하나는 ‘이 땅의 종자로 농사짓기’다. 자가채종 종자면 더 좋지만, 그게 아니라도 국산 종자를 쓰는 게 친환경농민의 바람이다. 그들로선 수입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약품 소독을 거쳐야 하는 종자에 거부감이 드는 게 인지상정이나, 그들의 고민을 정부는 깊게 인식하지 못한다.

전남지역의 유기농민 A씨는 최근 이모작 호밀을 심기 위해 종자를 구했다. 원래 농촌진흥청이 개발한 호밀 종자 ‘곡우’를 사서 농사지어온 그였으나, 지난해 말 농림축산식품부(장관 정황근, 농식품부)가 유기농업자재지원사업의 일환으로 호밀 종자를 지원한다는 소식을 듣고 약 700kg의 종자를 신청했다.

비용을 국비로 100% 보조받아 종자를 받은 것까진 좋았다. 문제는 받은 종자가 원래 A씨가 쓰던 ‘곡우’가 아닌 수입 종자였다는 것이다. 해당 종자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들여온 호밀 종자 ‘윈터그레이저-70(Wintergrazer-70)’으로, (주)NH농협무역을 통해 국내로 수입됐다. 그러나 A씨와 같은 지역의 다른 호밀 재배 농민은 ‘곡우’ 종자를 받았다는 게 A씨의 설명이다.

A씨가 보여준 ‘윈터그레이저-70’ 종자는 시뻘건 색이었다. 수입 종자는 국내 반입 시 필연적으로 약품 소독 과정을 거친다. A씨는 “약품 소독한 종자를 도저히 유기농지에 사용할 순 없기에 (종자를 보급한) 지역농협에 따지니 ‘지난 30년 동안 농협에서 수입해 보급해 왔다’고 답하더라. 관행적으로 그리해 왔다는 거다”라고 한 뒤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친환경농가 입장에선 비(非)친환경인증 농가와 달리 ‘잔류물질 문제(로 인한 친환경인증 취소문제)’가 걸리는 만큼, 지역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농관원) 지원에도 이 종자를 정말 써도 되는지 문의했다. 처음엔 ‘농식품부에서 써도 된다 하면 괜찮지 않겠냐’고 답하더니, 이후 다시 전화 왔을 땐 ‘그 종자 유기농 필지에 쓰면 절대 안 된다’고 번복하더라.”

여기까지 보면 유기농업자재지원사업 과정에서 마땅히 ‘곡우’ 등 국산 미소독 종자를 보급하는 게 당연하지 않나 싶을 테다. 원칙적으로도 유기농업 육성을 위해선 그게 맞다. 그러나 상황은 생각보다 복잡하다.

농식품부 친환경농업과 측은 “유기농업자재지원사업을 통해 지원하는 호밀 종자의 경우 기본적으로 수입 종자로 공급한다”며 “수입 종자에 소독제를 처리해서 들여오긴 하나, 파종 뒤 발아 과정에서 반감기를 거치며 소독제 성분이 조금씩 줄어들어, 수확 시기엔 호밀에서 소독제 성분이 나오지 않는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안인 한국친환경농자재협회 부회장은 “‘곡우’ 종자를 개발했다곤 하나 아직 보급량은 전체 호밀 종자 중 5%에도 못 미칠 정도로 보편화되지 않았다. 비단 호밀 종자뿐 아니라 이탈리안 라이그라스 등 녹비 작물 종자는 거의 다 수입한다”며 “일반적으로 종자에 소독되는 약품량은 극미량이라 생육 과정에서 분해되긴 하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소독 종자를 쓰는 건 유기농업 원칙에 위배되는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국산 호밀 종자가 극히 적으니 농가들은 국산 종자를 구하기도, 지원받기도 쉽지 않다”고 언급했다.

A씨는 “전부 다 수입 종자라면 이를 국산으로 대체할 수 있도록 정부 차원에서 노력해야 한다. 그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며 당연하다는 듯이 수입된 소독 종자를 유기농가에 내미는 건 문제가 있다”며 “‘곡우’ 등 국산 호밀 종자를 키울 채종포 운영부터 늘려 더 많은 농가에서 국산 종자를 활용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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