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형식이 내용을 결정할 수도 있다

  • 입력 2023.11.12 18:00
  • 수정 2023.11.12 20:58
  • 기자명 정성숙(전남 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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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숙(전남 진도)
정성숙(전남 진도)

나락 타작할 때는 5분이 아쉬웠다. 남편이 벼 포기를 4줄씩 콤바인으로 베기 시작하면 15분 정도 후에는 탱크가 찬다. 거치대에 톤백을 걸쳐 놓고 기다리고 있으면 콤바인 탱크에 다 찬 나락을 3분 동안 쏟아낸다. 곧바로 콤바인을 돌려세워서 나락을 베어 가면 톤백 입구를 묶고 새로운 톤백을 거치대에 걸고 입구를 펼쳐 놓는다. 콤바인을 운전하는 사람은 20분의 흐름 속 관성의 법칙에 묶인 것처럼 잠깐의 멈춤이나 기다림을 싫어한다. 20분의 리듬을 깨지 않으려고 식당에 국밥을 포장 주문해 놓고 트럭에 시동을 걸고 악셀을 밟는다. 길가의 억새와 갈대까지 트럭 꽁무니를 밀어주며 더 빨리 달려! 하는 것 같다. 국밥을 싣고 오는 길에 먼발치에서 보니 남편은 벌써 한 탱크를 채웠다가 펐는지 논바닥에서 콤바인이 돌고 있다. 남편이 혼자 나락을 푸느라 톤백이 자빠질 듯 한쪽으로 기울어 있다.

작전 치르듯 국밥을 논으로 가져오는데 25분. 논이나 밭으로 갈 때는 다른 집의 농사가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온다. 가깝게 지내는 이들의 농사는 더 눈여겨보게 된다. 농사 30년의 경험치는 눈짐작으로 수확량을 가늠할 수 있게 됐다. ‘저 논은 한 마지기에 나락 10가마니 털기 어렵겠네’라거나 ‘저 논은 12가마니를 무난하게 채우겠다’ 또는 ‘그 집 각시 들깨 깨나 털겠네’ 같은 식이다. 특히 수현이네와 지영이네 농사를 자주 비교하게 되었다. 수현이네보다 지영이네 농사 면적이 약간 더 많다. 그런데도 지영이네는 수현이네 농사 일정보다 빠르고 수월하게 소화했다. 반면에 수현이네는 일년 내내 논과 밭농사가 뒤처졌다.

모내기만 하더라도 지영이네는 외가와 친가 식구들까지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시작하나보다 싶으면 어느새 끝냈다. 수현이네는 부부 단둘이 모판을 실어다 심고 다시 모판을 가지러 가다 보니 하루에 모내기할 수 있는 양에 한계가 있어 속도감은 거북이가 땅 위를 걷는 것 같았다. 모는 시일이 지나 임계점에 다다르면 심어놔도 쉽게 자리 잡지 못하고 논에서 물러진다. 수현이네가 드디어 모내기를 마쳤나 싶었는데 심어 놓은 모가 녹아 없어진 곳이 너무 많아 여기저기에서 모를 얻어다 때우거나 이앙기를 끌고 논으로 다시 들어가 넓은 부분을 해결했다. 모내기를 해 놓은 수현이네 논은 물 관리를 제 시기에 하지 못해 피와 방동사니로 제대로 개판이었다.

수현이네 모내기 하는 모습은 지나다니면서 보는 나마저 피로감이 느껴졌다. 일의 모양새가 그쯤 되면 필시 부부의 다툼이 생기게 된다. 모판 관리를 잘못했느니 논의 수평이 맞지 않아서 그랬느니 서로 탓을 한다. 모내기하면서 체력이 방전되었음에도 서로에 대한 원망은 활화산처럼 힘이 넘쳤으리라.

수현이네와 지영이네는 부부 사이가 많이 달랐다. 지영이네 엄마가 밭에 풀을 매고 있으면 지영이 아빠도 옆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풀을 맸다. 아내와 같이 밭에서 풀을 매는 남자는 인근에서 지영이 아빠뿐이다. 지영이 엄마가 논두렁에 콩 모종을 심고 있으면 지영이 아빠는 뒤따라 물을 뿜어주며 가꾸고 거두는 과정까지 같이 한다.

반면에 수현이네 엄마 아빠 사이는 데면데면한 편이었다. 어쩔 수 없이 함께 일을 해야 하는 모내기나 타작할 때 외에는 손 맞춰 일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트럭 운전이 서투른 수현이 엄마는 주로 손수레를 끌고 다니며 혼자서 들깨나 콩을 심었다가 거두곤 했다.

부부 사이의 친밀도에 따라 농사의 수확물이 다른 것 같다.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기도 하다. 의논하면서 일정을 공유하고 수고를 나누는 형식과 ‘결정은 내가 할테니 너는 따르거라’, ‘니 일은 너만 알아서 하세요’하는 방식의 내용이 다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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