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 가자. 다 끝났다!”

  • 입력 2023.11.05 18:00
  • 수정 2023.11.05 18:14
  • 기자명 이광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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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이가 오늘 밤 쳐들어오리란 이병숙의 말에 필상이 의견을 밝혔다.

“아닙니다. 날이 밝으면 그때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자 장비 수염이 그럴싸한 이현규가 물었다.

“어찌 그러한가?”

“저들은 화력이 우수하고 기세가 강성하여 적은 수로도 조선군을 압도하였습니다. 그 자신감으로 기습이 아니라 정면에서 도전할 것입니다. 지리에 어두우니 더욱이나 야습은 못하겠지요. 전투는 동이 튼 후 벌어질 것이며, 문수산성 전투에서 세 명이 사살된 까닭에 단단히 방비한 뒤 피해를 입히면 사기가 떨어질 것입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양헌수가 등채로 손바닥을 두드렸다.

“훌륭한 분석이다. 허나 야습은 소홀히 볼 수 없는 일이니 오늘 밤은 성곽에서 대기해야 하겠지.”

별군관 두 사람에게 뇌까린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대는 남아서 싸우겠는가, 돌아가겠는가?”

“싸우겠습니다.”

“그렇다면 밖의 병졸을 따라 동문을 지키도록 하라.”

말을 마친 양헌수는 용무가 끝났다는 듯 고개를 틀었다. 전등사에서 나와 필상은 다금발이와 동문 성곽의 틈이 뜬 곳을 찾아 앉았다. 밤이 깊어가면서 바람이 드세어지고 성곽에 세운 깃발 때문에 귀가 시끄러웠다. 늦가을이라 한기가 뼈마디를 찔러오는데 민가에서 가져온 이불과 가마니가 지급돼 그들도 한 채를 뒤집어썼다.

“지금쯤 평산 땅에 닿은 네 부모님은 걱정이 많겠구나.”

다금발이가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였다.

“얼굴도 모르는 걸요. 어릴 때 역병으로 돌아가셨대요.”

“넌 몇 살이냐?”

“행랑채 아저씨 말로는 병진생이래요.”

“그럼 열한 살이구나. 난 을사생이니 올해 스물둘이다. 눈을 좀 붙이자. 적군은 동튼 다음에나 올 것이다.”

“이 판국에 잠이 올까요?”

“그래도 자둬야지. 고단한 하루가 될 게야.”

칼로 쪼갠 듯한 반달이 중천에 걸리고 산자락 너머에서 유성이 호를 그었다. 가을이라 긴긴밤에 한기마저 날카로워 번을 서는 병사들은 손에 입김을 불며 발을 동동 굴렀다. 필상과 다금발이는 민간인 신분이라 번에서는 면제되었지만 웅크린 채 자다 깨기를 반복하느라고 꼴딱 새느니만 못하였다. 새벽 예불을 알리는 범종 소리가 들리고 박명이 비치자 주먹밥과 산신제 끝나고 남은 소고기에 미역 넣고 끓인 국이 나왔다.

식사를 마친 병사들이 전투준비에 몰두할 즈음 부성 안의 주민이 나타나 적병이 출발했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아침을 먹고 육로로 출발하였으니 점심 전에는 도착할 예정이며, 병력은 백오십 명 남짓으로 경무장한 상태라고 하였다. 성곽에 쭈그려 앉은 병사들에게 화약과 총알이 지급되고 스님과 인근 주민들까지 동원되어 적이 기어오르면 던지라고 돌덩이를 주워 날랐다. 적이 나타나거든 미리서 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군령이 내려왔으며, 집에 있는 식솔과 노심초사하고 있을 성상의 안위를 먼저 염려해야 한다는 우스꽝스러운 전언이 건너왔다.

병사들은 각 도에서 행관초모(行關招募)한 선정포수(善政砲手)인데 저격에 일가견이 있는 엽사들이라 터무니없이 비장해 보이는 군관에 비해 도리어 침착하게 상황에 대비하였다. 아군의 총은 사거리가 백여 보에 불과하지만 지형의 이점을 충분히 누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의사도 묻지 않고 전장에 데려온 것을 다금발이가 원망이라도 할까봐 필상은 걱정이 되었으나 녀석도 낯빛이 결연하였다.

“온다!”

성곽에 엎드려 포안에 만리경을 대고 밖을 살피던 이병숙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선원면과 인정면에서 내려와 대모산을 끼고 교차하는 대로에서 동문과 남문 쪽으로 프랑스군이 대오를 갈랐다는 것이었다. 얼마 뒤에 과연 말 탄 지휘관과 구보로 따르는 적병이 나타났다.

“기다려라!”

이병숙이 낮게 명령하였다. 말 탄 지휘관이 뒤에다 뭔가 지시하자 군사 셋이 나와 동문에 이르는 산록을 기어올랐다.

“화약!”

필상이 낮게 외치자 다금발이가 주머니의 마개를 풀어 내밀었다. 화명과 총신에 화약을 채우고 총알을 굴린 다음 꼬질대로 다지고 총안에 총신을 밀어 넣었다.

“쏘아라!”

명령이 떨어지자 총성과 함께 성곽 위에서 연기가 피었다. 뒤에서 고각이 소리를 끌었고 둥둥 북소리와 깨갱깽 쇳소리가 골짜기를 째며 싸움을 독려하였다. 필상은 말을 타고 있던 지휘관을 겨냥하였는데 화약 연기 속에서 느슨하게 굴러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다시 장전하고 총을 쏘면서 보니 말에서 떨어진 지휘관이 사지를 잡혀 들려가고 산록에서 미끄러진 자를 끌어내리는 병사도 있었다. 그러나 전열을 정비한 적병이 산록의 나무와 바위를 엄폐물 삼아 총을 발사하자 성벽을 맞고 튀는 총알이 이마를 뚫을 듯 핑핑 소리를 냈다. 화약 연기로 코가 짓무를 지경이 되고 눈이 따끔거렸으나 포수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침착하게 불을 놓았다. 필상 역시 무엇에 들린 사람처럼 화약을 채우고 꼬질대로 다지고 쏘는 일에 몰두하였다.

“화약이 떨어졌다! 더 가져와라!”

다들 얼마나 불질을 하였던지 넉넉히 지급한 화약이 떨어졌다고 난리였다.

“이게 마지막이우. 아껴서들 사용허시우.”

화약을 가지고 온 병사가 성벽을 따라 병졸들에게 조금씩 나누어주며 당부하였다. 그러나 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병사들은 총을 발사하기 급급하였다.

“화약이 떨어졌다. 아껴라! 조준해서 쏘아라!”

이병숙이 좌우에 대고 외쳤다.

“이게 마지막이에요. 화약이 떨어졌어요.”

주머니에 몇 차례 화약을 담아왔는데도 다금발이는 마지막이라고 소리쳤다.

“넌 죽는 게 무섭지 않니?”

필상은 고개를 돌려 녀석을 보았다.

“죽긴 왜 죽어요. 적이 넘어오면 산속으로 튈 건데요. 선비님은 저만 따라오세요.”

필상은 총알이 날아다니는 와중에도 빙긋 웃었다. 이것이 어찌 다금발이의 싸움이란 말인가.

“적이 도망간다!”

어디선가 그런 소리가 들렸고,

“우리가 이겼다!”그렇게 외치며 만세를 부르는 자도 있었다. 슬며시 고개를 내밀고 보니 적병은 뒤돌아 총을 쏘면서 부상당한 동료를 옆구리에 끼고 사정거리를 벗어나는 중이었다. 그래도 안심할 수 없어 병졸들은 몸을 세우지 못하고 총안을 통해 넘겨다보는데 산모퉁이를 돈 적병의 후미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만리경으로 그를 쳐다보던 이병숙이 그제야 몸을 일으켰고, 언제 떠왔는지 다금발이가 내민 표주박의 물을 필상은 달게 들이켰다.

주먹밥으로 배를 채운 병사들은 적이 원정할 채비를 더는 하지 않는다는 소식에 전등사 아무 데나 들어가 잠을 잤다. 이튿날에도 역시 도전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하더니 하루가 더 지나자 장녕전(長寧殿)과 만녕전(萬寧殿), 행궁(行宮) 등에 불을 놓았다는 첩보가 날아들었다. 이어 네 척의 배에 노략질한 물건을 싣고 갑곶진을 떠났다는 전갈이 오고, 점심 후에는 작약도의 본대와 합세하여 외양으로 빠졌다는 영종첨사의 기별이 날아왔다. 전투에서 희생된 포수 윤춘길의 장례 절차를 논하던 양헌수는 병력을 나누어 일부는 산성을 지키게 하고 그 자신 부성에 입성할 태세를 갖추었다. 그가 찾는다 하여 필상은 처음 만난 승방으로 다금발이를 데리고 올라갔다.

“장계에 그대의 전공을 기록할 터이니 나와 더불어 진충보국함이 어떠한가?”

양헌수의 제안에 필상은 발끝으로 땅을 차는 문밖의 다금발이를 보았다.

“은혜를 베풀 양이면 저 아이가 면천되도록 기록해주소서.”

양헌수가 힐끗 밖을 보았다.

“내 언젠가 호남에 부임하거든 연락하도록 함세. 잘 가시게.”

양헌수는 없는 사람 취급하듯 등을 돌린 채 장졸들에게 할 일을 지시하였다. 예를 올리는 둥 마는 둥 하고 필상은 다금발이의 등을 밀었다.

“그만 가자. 다 끝났다!”

그들은 정족산성을 나와 터덜터덜 옷골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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