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들녘 거점 화장실에 대한 고민

  • 입력 2023.10.29 18:00
  • 수정 2023.10.29 21:39
  • 기자명 구점숙(경남 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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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점숙(경남 남해)
구점숙(경남 남해)

늦여름부터 초가을에 비가 잦아 가을농사가 늦게 시작되었습니다. 그 궂은 지난 계절의 날씨와는 달리 깊은 가을 날씨는 연일 맑아서 고맙다고나 할까요? 짧은 기간에 가을 파종을 하려하니 곁눈질 한번 못하고 내리 일해야 했습니다. 귀촌한 지 4년째 접어든 이웃도 농사의 양을 조금 늘렸습니다. 풍경 좋은 바닷가 펜션 마을에 이사를 했더라면 필경 펜션 일을 했을 분들이, 공기 좋다고 우리 마을로 이사 온 바람에 농사꾼 이웃과 더불어 살며 텃밭농사를 조금 늘이기 시작하더니 올해는 거의 전업농 수준으로 거듭났습니다.

새내기 농사꾼 부부는 갑자기 불어난 일에 잇몸이 들뜨기도 하고, 일 시간에 맞추느라 잠을 설치기도 하며 농사일에 익어가고 있습니다. 멋모르고서 몇 가지만 통제하면 되는 줄 알았다가 알면 알수록 복잡하고 어려운 농사에 대해 버거워하면서도 또 농사가 주는 즐거움에 빠져가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요즘에는 마늘 싹이 올라오나 안 올라오나 열심히 관찰합니다. 새초롬하게 올라오는 마늘 싹이 너무 예쁘답니다. 아니 그렇겠습니까? 저것이 경제성만 있다면 딱 금상첨화인데, 그 얘기는 다음번에 하기로 하겠습니다.

아침 6시30분이면 들로 나가 인부들과 같이 마늘을 심고, 9시면 새참을 먹습니다. 인부들이 인근 도시에서 새벽에 나선 분들이라 아침밥 같은 오전 참을 준비합니다. 그러면 커피까지 마시고 부리나케 자리에서 일어섭니다. 짧은 해에 부지런히 손을 놀려야 주인 마음에도, 일꾼 마음에도 흡족한 성과를 낼 수 있기에 잔소리도 필요 없이 속도를 내는 것이지요. 새참을 먹자마자 일제히 몸을 움직여 행하는 일은, 언덕 아래나 논두렁 사이의 한갓진 곳으로 가서 볼일을 보는 것입니다. 여러 명이다 보니 서로 망을 봐주며 일을 보는 데에 익숙한 듯합니다. 굳이 수치심을 가지거나 거리낌을 가질 필요가 없이 말입니다. 혹자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피며 타자의 접근을 막고자 하는 분도 있고, 어떤 분은 아예 고개를 푹 숙이고는 눈만 안 마주치면 된다는 듯 피합니다. 매번 그렇지만 마음이 쓰이는 대목입니다. 집 가까이 있는 논밭 아니라, 집과는 좀 떨어진 곳의 큰 들판이다 보니 큰일을 보고 싶으면 꽤나 난감한 일지요.

문제는 새내기 농사꾼 언니입니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언니는 여성이 들판에서 대놓고 볼일을 보는 데 대해 거의 공포감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 아침참으로 물, 과일, 커피까지 마신 수분을 배설하지 않고 체내에 그대로 두는지라 부풀어 오른 방광을 억지로 참으며 점심시간을 기다립니다. 안 그래도 신장이 약해서 조금 피로하면 얼굴이 잘 붓는 언니의 몸 상태를 아는지라, 억지를 부립니다. 봐 줄 테니까 신경 쓰지 말고 볼일을 보라고 권하는데, 권하면서도 어쩐지 당당하지 못합니다.

인도의 농가에는 화장실이 없다지요? 그 더러운 것을 집 가까이 두는 것이 더 지저분하다며, 아침이면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가서 볼일을 본다는 얘기를 직접 들었습니다. 화장실이 공간적 개념이 아니라 시간적 개념이라며, 작은 일을 볼 때면 한쪽 벽면이 가려진 어느 곳에서나 볼일 보기가 수월한 남성과 달리 여성들은 사방이 막힌 공간에서라야 안도감을 느끼며 볼일을 볼 수 있습니다. 여성의 정조를 그렇게도 중하게 생각하는 가부장 문화가 강할수록 여성의 일상적인 또는 생리적 욕구를 보장하는 사회시설 정비에는 관심이 없는 듯합니다.

그러니 그토록 일을 많이 하면서도 볼일 볼 때는, 눈을 피하거나 지레 긴장하며 볼일을 보는 것이지요. 예전 사회에서는 그럴 수도 있었겠습니다만, 농촌들녘에도 걷기 운동하는 사람, 자전거 타는 사람, 작업차량이 골목골목을 다 누비는데, 그 눈길에서 보호받으며 볼일 볼 공간이 없습니다. 모든 논밭에 화장실이 다 있을 필요는 없지만, 큰 들녘과 곳곳의 마을회관 화장실을 공동 화장실로 삼는 섬세한 정책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농사일이 아무리 바빠도 볼일까지 참아가며 일하는 고난 대신, 좀 인간답게 살 수 있어야겠지요. 아, 글로벌 GAP 인증 농장은 화장실과 세면대가 필수라고 하지요? 농작물의 오염을 막기 위해서요. 농기계 의존도가 높은 외국과 달리 사람 손을 거쳐야 농사가 완성되는 한국 농업의 특성상, 한국형 거점 들녘 화장실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농촌이 선진화되어야 비로소 선진국이 완성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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