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군관을 만나러 왔소”

  • 입력 2023.10.29 18:00
  • 수정 2023.10.29 21:39
  • 기자명 이광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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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고른 두 사람이 허리를 펼 즈음 문수산성에 포를 쏘던 함선이 뒤로 빠지고 병사를 실은 화선이 염하를 질러갔다. 갑곶진과 문수산성이 적병을 틀어막지 못하면 한강이 봉쇄되어 한양은 밀봉한 호리병처럼 답답해지는데 갑곶진이 떨어졌으니 팔 하나는 절단 난 상황이었다. 그런데 갑곶진을 수중에 넣은 프랑스군이 이번에는 염하를 건너 문수산성을 정벌하기 위해 배를 띄운 것 같았다.

기선에서 쏟아진 프랑스 병사가 뭍에 오르자 조선군이 총포를 쏘는지 염하에서 크고 작은 물기둥이 솟았다. 해변의 프랑스군 진영에서도 응사를 하느라고 목화꽃 같은 연기가 피었다가 졌다. 조선군이 장약을 재우는 틈에 프랑스군이 함성을 지르며 문수산 솔수펑이를 파고 들었다. 그런 직후 화선 한 척이 뱃머리를 돌려 나왔다.

“적병이 총탄에 맞았구나.”

필상이 중얼거리자 어리둥절해진 다금발이가 쳐다보았다.

“그걸 어찌 아세요?”

“저리 서둘러 귀선하지 않느냐?”

“그렇담 죽었을까요?”

“글쎄다.”

“이 먼 곳까지 와서 죽다니…… 적병이지만 가엾어요.”

선수를 돌린 배는 염하 중간쯤에 이르렀고 문수산 방면의 지지고 볶는 소리가 사나워졌다. 염하를 건넌 배가 돈대 아래에 멎더니 병사 몇이 늘어진 녀석들을 들쳐업고 갑곶진으로 올라갔다.

“제대로 맞은 건 세 놈이네요.”

“세 놈 맞다.”

대답을 하고서 필상은 김진사의 차남이 건넨 보자기를 풀었다.

“어쩌시려구요?”

“불질을 해볼란다.”

다금발이가 손사래를 쳤다.

“아서요. 들키면 어쩌시게요?”

“세상천지가 총성인데 누가 알아본단 말이냐?”

“더리미 포구에서 보고 일러바치면요?”

“그놈 겁은 되우 많구나. 넌 내려가 있거라.”

“어떻게 저만 내려가요.”

말은 내려가자 하였지만 총 쏘는 일을 거들 생각인지 다금발이는 화약주머니를 집어 들었다. 김진사의 차남이 건넨 총은 말로만 듣던 수발총(燧發銃)으로 방아쇠를 당기면 공이치기가 부시를 때려 절로 격발되는 신식 화승총이었다. 총은 사용할 일이 없었는지 아니면 주인이 꼼꼼한 탓인지 그을린 자국 하나 없이 깨끗하였다. 필상이 화명 덮개를 젖히자 다금발이가 화약주머니의 마개를 뽑아 내밀었다. 화명과 총신에 화약을 넣고 총알을 굴린 다음 꼬질대로 눌러주는데 병장기를 다룬 지 오래건만 몸이 알고 격식을 찾아가니 신기한 노릇이었다. 필상은 바위에 엎드리며 하늘을 보았다. 수발총은 화승을 끼우지 않는 장점이 있지만 습기가 많으면 불꽃이 약해져 발사되지 못하는 약점도 있었다. 아침에는 맑았으나 염하 쪽에 물안개가 보였다.

“갑고지까지 날아갈까요?”

“어찌 게까지 닿겠느냐?”

“그럼 뭐하러 쏜답니까요?”

“넌 참 궁금한 게 많구나. 공부 삼아 해보는 거다.”

필상은 숨을 멈추며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생각보다 큰 소리와 함께 총구와 화공덮개에서 연기가 새나왔다. 다금발이가 화약주머니를 내밀었고 같은 방식으로 한 발을 더 발사하였다. 이번에도 다금발이가 주머니를 내미는데 어쩐지 둘은 죽이 척척 맞았다.

“그만 돌아가요. 눈치 채겠어요.”

“녀석도 참…… 무에 그리 겁이 나느냐?”

“선비님은 몰라요. 노비들은 원래 겁이 많아요.”

녀석의 말에 필상은 아무소리 못하고 일어났다. 물안개가 짙어지면서 염하 건너편이 끄무레해졌다. 그러나 총성은 여전히 사나웠고 문수산 정상에 가까워지는 것으로 보아 조선군이 힘에서 밀리는 눈치였다. 두 사람이 염하를 따라 걸을 때쯤 통진 땅은 뿌연 안개에 파묻혔다. 날씨가 변덕을 부려 쫓기는 조선 병사에게는 천운이 따르는 셈이라고 필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짙어진 안개 속으로 누렇게 일어나는 불길이 달걀흰자에 싸인 노른자처럼 건너다보였다. 문수산성은 인차 적군 손에 넘어간 형국인데 저희 쪽 병사가 당한 보복으로 장대에 불을 지르는 모양이었다. 총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안개 속의 노른자가 점점 커지는 양상이라 필상은 아마도 민가가 불에 타는가 하였다.

 

“선비님, 선비님!”

하루는 밖에 나간 다금발이가 급히 외치며 뛰어들었다.

“숨 쉬어라, 이눔아!”

필상이 타박하자 녀석은 허리를 구부리고 숨을 몰아쉬었다.

“조선군이 하아하아…… 덕진진에 하아하아…… 상륙했대요. 새벽에 상륙해서 하아하아…… 정족산성에 들었대요.”

“그게 참말이냐?”

“참말이고 말구요. 전등사 스님이 맞아들였는데 벌써 사람들이 식량과 화약을 갖다 준대요.”

“나가 보자!”

필상은 다금발이를 앞세워 서둘러 훈련도감 뒷산에 올랐다. 해가 중천에 오르도록 관찰하였으나 갑곶진의 적병은 보초를 서거나 구령에 맞춰 귀대하는 등 다른 낌새를 보이지 않았다. 필상은 조선군의 동태를 아직은 저들이 모르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부성을 제 집처럼 왕래하고 서학에 물든 자들이 일러바칠 것이므로 해 안에 소식을 듣게 되리라 믿었다.

“배가 고프구나. 돌아가자.”

염하를 끼고 옷골로 돌아온 그들은 밥부터 챙겨 먹었다. 요기를 한 뒤에 필상은 개켜지지 않은 이불 속에다 몸을 넣었다.

“한잠 잘 테니 부성에 들어가 무슨 소식이 있는지 알아보고 오너라.”

“낮잠을 주무신다니 선비님은 태평도 하시네요.”

“그럼 무얼 한단 말이냐? 후딱 갔다 오너라.”

순무로 담은 깍두기에 밥 한 그릇을 게 눈 감추듯 해치웠더니 그렇잖아도 볕 좋은 날에 잠이 쏟아졌다. 얼마가 지났는지 다금발이가 달려와 부성에도 조선군 상륙 소식이 파다하더라고 전하였지만 그때까지도 그는 잠에 취해 있었다. 늦가을 땅거미가 일찌감치 내려와 든든히 배를 채우고 수발총을 꺼내들자 다금발이가 솜 넣은 옷을 입고 따라나섰다. 마을을 나와 대모산을 비껴 돌자 능선에 걸린 정족산성과 문루 없이 뚫린 동문이 나타났다.

“지휘군관을 만나러 왔소.”

필상의 말에 번을 서던 군사가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뉘신데 그러슈?”

“옷골 김진사댁 식객인데 힘을 보태러 왔소. 지휘관에게 안내해주시오.”

“천총(千摠)께선 군무에 바쁜 터에 어찌 낯선 사람을 들이겠소.”

외병과 싸우러 온 군사라 병사는 제법 빡빡하게 나왔다.

“양이가 침범한 날로부터 빠짐없이 지켜본 사람이오. 그런 사실을 알려 군략에 도움이 되려는데 어찌 계통만을 따지는 게요. 일이 잘못되면 볼기로 감당하시려오?”

필상은 시정잡배와도 너나들이로 어울리지만 의관을 갖추면 풍신이 좋고 말에 책잡힐 내용도 없고 보니 병사도 긴장되는 모양이었다. 그가 성곽의 군졸에게 눈짓하였고 연초 한 죽 태울 참이 되어 들어오란다는 전갈을 받아왔다. 전등사 경내의 선방으로 그들을 안내한 병졸이 안에 대고 통기하자 문이 열리면서 세 사람 얼굴이 나타났다. 그중 어린갑(魚鱗鉀)을 차려입은 사람이 순무천총 양헌수였으며, 성을 순시하고 군사를 배치한다고 한바탕 홍역을 치른 끝에 별군관 이현규와 이병숙을 불러 방어책을 논하는 중이었다.

“나는 양이를 구축하기 위하여 어명을 받들어 건너온 순무천총이다. 그대는 누구인가?”

양헌수는 우람한 체구에 눈이 부리부리하고 흰 올 섞인 수염이 풍성하였다.

“옷골 김진사댁 식객인데 전라도 금구에서 온 김필상입니다. 지난 한 달간 그 댁에 기거하며 양이들을 관찰하였기로 말씀드리고자 하옵니다.”

“요약하여 보고하라.”

“양이들은 오륙백에 달하며 성능 좋은 총과 대포로 무장하였습니다. 훈련 상태가 양호하고 용감하여 다루기 어렵습니다. 오전엔 조선 군사가 들어온 것을 알지 못하였으나 서학의 무리가 일러바쳤을 것이므로 지금쯤은 눈치챘을 것입니다.”

이야기를 듣고 동달이 차림의 이병숙이 의견을 밝혔다.

“그렇다면 오늘 밤 닥치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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