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원의 농사일기 180] 대상포진

  • 입력 2023.10.29 18:00
  • 수정 2023.10.29 21:38
  • 기자명 윤석원 중앙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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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원 중앙대 명예교수
윤석원 중앙대 명예교수

 

시나노골드 수확과 판매가 일단락되고 좀 쉬게 됐을 즈음, 몸이 몹시 피곤하고 무겁고 힘들었다. 처음에는 감기몸살인 줄 알았는데 며칠 지나도 차도가 없더니, 등 가운데에서 앞가슴까지 심한 통증과 가려움을 동반한 붉은 포진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제야 동네 통증의학과에 갔더니 대상포진이라며 일주일쯤 약을 먹으면 좋아질 거라 했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나도 호전되지 않았고, 결국 서울로 올라와 신경치료를 받게 됐다. 2주가 지나면서 조금씩 호전되는 것 같았으나 신경통으로 진행돼 완치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거라고 했다. 대상포진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힘들고 피곤해 면역력이 떨어지면 발생하는 데 ‘힘든 일이 있으셨냐’고 주치의가 말했다. 그러면서 연세도 있으니 무리하지 말라는 부탁도 잊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귀농한 후 지금까지 크게 아픈 적은 없었다. 비교적 건강하게 잘 지냈다. 농사일도 ‘너무 힘들면 오래 못 한다’는 지인의 충고를 명심해 평소 무리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초보농부에게 유기농 사과농사가 결코 쉬운 게 아니라는 사실을 3~4년이 지난 후에야 깨닫기 시작했으나 그렇다고 포기하거나 다른 작목으로 전환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기왕 시작한 사과농사이니 제대로 한번 키워보고 생산해 내고 싶은 인생 목표가 생겼다. 거창하게 귀농한다고 세상에 알려진 이상 뭔가 매듭을 지어야 한다는 강박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농사지으러 가서 생산도 못 해보고 중도에 포기한다는 것은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생산물을 수확·판매해 봐야만 농사일이 완성된다고 생각했다. 8년이 지난 금년에야 적지만 유기농 사과를 생산할 수 있었고 판매도 했으니 사과 농사꾼으로서의 목표는 일단 달성한 셈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사과 생산을 실패한다고 해서 누가 뭐라 할 사람도 없을 터인데, 일단 세운 목표를 달성해야 직성이 풀리는 강박 같은 것이 내게는 있는 것 같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뜻이 있어 스스로 세운 목표는 꼭 이루고 말겠다는 순박한 고집이 있다. 그래서 나를 잘 아는 지인들은 참 피곤하게 산다고들 한다. 내가 살아온 삶의 궤적을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가난한 독립유공자의 후손으로서 어렵더라도 어떻게든 대학에 가야 하고 졸업하겠다는 목표,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학위를 따 봐야겠다는 목표, 전원주택을 지어 살아보겠다는 목표 등도 내 인생에서 결코 쉽지않은 목표였지만 어쨌든 이뤄 냈다. 그러나 그때에도 지금과 같이 열흘 이상을 꼼짝하지 못하고 아팠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나이가 지금보다는 훨씬 젊었을 때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귀농과 유기농 사과 생산이라는 전혀 생소한 또 다른 인생 목표를 8년 만에 겨우 달성했으니 이제 정식 농부가 됐다고 자부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인지 긴장이 풀리고 그동안 쌓였던 육체적·정신적 피로감이 대상포진이라는 형태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싶다.

앞으로 남은 인생에서는 더이상 모든 것을 걸 만큼의 인생 목표를 설정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스스로 세우는 목표는 더이상 없을지도 모른다. 죽는 날까지 주어진 삶을 관조하며, 글도 쓰고, 책도 쓰고, 농사도 지으며 자연과 더불어 소박하게 하루하루를 살고 싶다. 어쨌든 건강이 허락하는 한, 내년에도 열심히 유기농 사과 농사를 지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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