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일장을 맛보다㉛] 농부가 주인인 시장, 원주 새벽시장

  • 입력 2023.10.22 18:00
  • 수정 2023.10.22 19:34
  • 기자명 고은정 제철음식학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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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새벽시장의 전경.
원주새벽시장의 전경.

 

고은정 제철음식학교 대표
고은정 제철음식학교 대표

강원도의 도청소재지인 춘천보다 커져 이제는 어엿하게 대도시 같은 면모를 갖춘 원주를 만나고 왔다. 나 어릴 때 교과서에도 언급된 군사도시 원주는 이미 사라진 유물 같은 것이었다. 직업군인 아버지를 둔 내가 중·고등학생이었을 때 들락거리던 군부대 담장과 군인극장 등이 있던 원주는 어디에도 없었다. 추억에 잠길 수는 없어서 서글프기도 했지만 새벽시장에 도착해서는 어느 사이 다 잊고 시장 분위기에 동화되어 야단스레 좋아하는 나를 보았다.

원주 새벽시장은 4월 14일(금)부터 12월 10일(일)까지 매일, 새벽 4시부터 9시까지 5시간 동안 열리는 농민의 시장이다. 농민의 시장이라니, 우리나라에 오직 하나밖에 없는 농민의 시장이라니 얼마나 부러운지 모르겠다. 그것도 봄부터 초겨울까지 매일 열린다니 근처에 있는 배말이라 이름 붙은 아파트단지로 이사를 하고 싶은 심정이다. 이리로 이사를 오고 시장엘 들락거리면, 자꾸만 더 큰 용량의 냉장고를 찾거나 김치냉장고와 냉동고를 별도로 들여놓고도 냉장고에 수납공간이 부족하다며 징징거리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매일 아침 새벽시장에 나가 그날 필요한 식재료를 사서는 그 재료들로 세끼 밥을 해서 먹는 일은 상상만으로도 그저 행복하다.

 

좌판을 펼치는 농민들.
좌판을 펼치는 농민들.

 

6시, 미처 동이 트지 못한 시간이지만 이미 거의 모든 자리에 농부들의 농산물들이 펼쳐져 있다. 거의 끝물에도 여전히 고가인 송이버섯이나 능이버섯이 있고, 그 옆엔 1개에 1,000원 1장이면 사는 호박도 있다. 내가 사는 지리산 북쪽의 인근 마을에선 올해 호박농사가 잘 안 됐는데 여기는 그렇지 않은가 보다. 싸지만 맛있게 생긴 둥근 호박들이 제법 보이니 말이다. 서울로 올라갔다가 귀가할 예정이라 어머니께 드리고 싶어 호박을 4개나 샀다. 너무나 싸서 내 주머니에서 나간 돈은 겨우 4,000원이다. 비슷한 무게의 옆자리 송이는 가격이 많이 내렸다지만 1kg에 무려 45만원이고. 비교하고 다니면 마음이 불편해서 힘드니 자꾸 외면하고 싶다.

몇 걸음 옮기니 밭에서 막 캐왔을 고구마도 보인다. 아직 수분이 채 마르지 않았고 도심의 마트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잔뿌리가 많은 고구마들이다. 가을아욱과 함께 세트로 팔리는 다슬기 종지도 있고, 한 줌씩 가지런히 놓인 각종 채소들도 있다. 박스 위에 놓고 파는 상품성 떨어지는 배 무더기조차도 너무 예쁘니 이런 게 장터를 들락거리는 소비자의 마음이 아닌가 생각한다.

강원도의 장터에서나 볼 수 있는 특별한 것도 보인다. 강원도 사람들은 두부를 하고 남은 비지를 청국장처럼 띄워서 먹는데 그 비지를 고작비지라 부른다. 그 고작비지를 파는 분을 만났다. 어머니께 드리려고 사고, 내가 먹으려고 사고, 같이 간 사진작가와 동료도 반겨 샀다. 비지찌개 해먹을 생각에 벌써 허기가 밀려오는 기분이 든다.

 

'단풍깻잎'을 팔던 좌판
'단풍깻잎'을 팔던 좌판

 

이맘때의 장터가 아니면 만날 수 없는 단풍깻잎도 여기저기 보인다. 내가 관심을 보이자 이게 마지막이라며, 날이 추워 들깨를 다 뽑았기 때문에 더는 만날 수 없다고 어서 빨리 사가라고 하신다. 안 살 수 없어 주머니를 연다. 우리가 흔히 쌈으로 먹거나 간장절임, 김치 등으로 먹는 깻잎은 들깨의 잎이다. 참깨와 달리 들깨는 잎을 많이 먹는다. 그래서 아예 깨를 포기하고 잎만 뜯어 파는 농부들도 많다. 들깨가 꽃을 피우고 작은 꽃들 안에 씨앗이 맺히면 들깨의 잎은 노랗게 단풍이 든다. 우리 윗대 어른들은 그 잎을 뜯어 모아 소금물에 삭혔다가 된장(강원도에서는 막장)에 박아 장아찌를 만들어 먹었다. 잉여농산물을 이리저리 알뜰하게 조리하고 저장해 먹어온 조상들의 지혜에 절로 감탄을 하게 된다. 아직은 사라지지 않고 지역의 농부들에 의해 이어지며 장터에도 나오니 그 맛을 아는 나 같은 소비자들에게는 정말 다행스런 일이다.

 

색이 짙고 알이 작은 들깨.
색이 짙고 알이 작은 들깨.

 

들깨를 들고 나오신 어른께서 들깨 사는 요령을 알려주신다. 색이 짙고 알이 작은 것이라야 기름이 많이 나오고 더 고소하다고. 사람들은 알이 굵고 색이 연한 것을 농사가 더 잘 된 것으로 알지만 그건 잘 모르는 얘기라신다. 오늘도 또 배운다. 매번 장에 올 때마다 장터에 계신 모든 분들이 다 나의 스승임을 깨닫는다.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붉은 고추, 아직 속이 덜 찬 배추, 단맛이 조금 모자라는 무, 알타리무, 쪽파와 대파, 생강 등을 보니 곧 김장시장도 열릴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김장거리를 사다가 김장을 하는 상상을 하며 장터를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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