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정춘추] 이백마지기 농사가 힘든 이장님, 동네 땅 다 먹겠다는 청년

  • 입력 2023.10.22 18:00
  • 수정 2023.10.22 19:34
  • 기자명 김정섭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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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섭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김정섭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추석 때 수십 년 교직을 마치고 고향으로 내려오신 외숙을 뵀는데, 불쑥 말씀하신다. “앞으로 누가 농사짓는다니? 동네 이장이 그래도 젊은 축이라고 더 늙은 사람들 논을 맡아 농사짓는 게 200마지기란다. 그런데 자기도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여서 힘들다더라. 시골에 이렇게 사람 없으니 논을 그냥 두어 피농사를 짓거나, 마구잡이로 약을 쳐 풀이 누렇게 마르다 못해 논둑 무너지는 꼴 자주 본다. 네 조카를 자세히 보니 집안일 도울 때 성실하고 꼼꼼한데, 학교 공부는 싫어하니 앞으로 크면 농사를 직업으로 갖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그때쯤이면 대학에 들어가는 것도 별 의미가 없을 테다.” 이웃 동네에서 농사짓는 내 동생의 중1짜리 막내아들 이야기였다.

청년 농민이 너무 적은 지금 추세가 계속되면, 삼사십 년 뒤의 상황이 어떨지 상상하기 어렵다. 농민 수가 적으니 집집마다 지금보다 몇 배 넓은 농지에서 이른바 ‘규모의 경제’를 이루며 경제적으로 안녕할 수 있을까? 그런 식의 세대교체가 저절로 이루어질 것 같지는 않다. 설령, 호당 경지면적이 다소 증가하더라도 그것이 농업·농촌의 여러 문제를 없앨 ‘한방’이 될 리도 없다. 논농사를 중심으로 따져보자. 1990년에 한국의 농경지 면적은 211만ha, 농가 수는 177만호였다. 호당 경지면적은 1.2ha였다. 그로부터 30년 뒤 2020년에 농경지 면적은 157만ha, 농가 수는 104만호, 호당 경지면적은 1.6ha가 됐다. 농가 수는 40.1% 줄었는데, 호당 경지면적은 33.3% 증가했다. 호당 경지면적 1.6ha가 전부 논이라고 해도, 실제로는 그 절반 정도일 테지만, 24마지기다. 그런데 적어도 2만평, 즉 100마지기 논농사를 지어야 도시 근로자 가구 평균 소득에 가까운 농업소득을 얻을 수 있다.

땅을 얻기는 조금 쉬워질지 모르지만, 복잡하게 계열을 이루는 농작업 중 상당 부분을 농가 밖의 고용 노동력, 기계, 투입재에 더 의존하게 될 터이다. 그만큼 밖으로 빠져나가는 돈이 늘어날 텐데, 그런 비용은 농산물 가격보다 몇 배 빠르게 상승한다. 땅을 많이 빌려 늘어난 조수입을 늘어난 경영비로 까먹게 된다. 게다가 이 셈법은 평균값으로만 따진 것이다. 현실에서는 수많은 농가의 상황이 평균값 주변에 가지런하게 분포하지 않는다. 수십 년 뒤에는 극소수의 대형 농업경영체, 소수의 소농과 더 많은 농업노동자 계층으로 양극화된 구조가 형성될 가능성도 엿보인다. 그런데 농업노동자는 농민의 꿈과 거리가 있다. 예로부터 소규모 자영농보다 소작농이, 소작농보다 농업노동자가 돈을 더 많이 번다고 해도, 농민들은 자작농이기를 원했다. 여기에는 돈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다른 이유, 자주적인 삶이라는 꿈이 있다. 요즘 귀농하려는 젊은이들의 로망과 겹치는 부분이다. ‘크게 농사짓는 것’만으로 농촌살이의 즐거움이나 보람이 보장되지는 않는다.

몇 해 전, 논 10만평(500마지기) 농사짓는다는 20대 초반 젊은이의 인터뷰를 TV에서 본 적이 있다. 벼농사로만 몇 억원 소득을 올린다는 이 청년은, 장래 희망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제 희망은 앞으로 농지를 계속 넓혀 동네 땅을 다 먹는 것입니다.” 대단한 포부라며 격려하는 분위기 속에서 인터뷰가 끝났다. 그때의 위화감이란…. 지금도 설명하기 힘들다. 그런 젊은이들 몇몇으로 채운 미래의 농촌 마을은 어떤 모습일까?

그동안 시골살이를 시작한 청년을 여럿 만났다. 각자도생이 유일한 선택지인 도시에서 탈주해 다른 삶을 찾아왔다는 청년, 땅이 적어서 다른 ‘알바’로 돈 벌어 생활하고 농사에 투자하니 ‘농사 아닌 활동을 해야 농사지을 수 있다’는 청년 등등. 농촌에는 다양한 젊은이가 있어야 한다. 그만큼 이들이 진입할 경로도 다양해야 한다. 단순히 농업의 규모화․전문화만으로 농업․농촌의 미래를 헤아리는 것은 안이하다. 농과계 학교 교육 외에도, 농업과 농촌살이의 모든 측면을 가르치고 인도할 갖가지 경로를 농촌 현장에 그물망처럼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단순한 ‘한방’에 익숙한 문화 속에서, 다양한 경로를 끈질기게 예비하는 정책은 좀처럼 마련되지 않는다. 깨달음은 언제나 뒤늦고, 방법은 항상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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