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살림을 배웁시다

  • 입력 2023.10.22 18:00
  • 수정 2023.10.22 19:34
  • 기자명 신수미(강원 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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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수미(강원 원주)
신수미(강원 원주)

얼마 전 후배가 ‘왜 남자들은 농사일은 해도 살림은 안할까?’라고 물었다. 주말 부부로 사는 후배는 얼마 전 남편 농장에 다녀왔는데, 남편 농장에 일 도와주러 온 대부분 남성들은 여성이 나타나 밥을 해주기 전에는 일만 하고 있더라고 했다. 하우스 일은 궁금해도 냉장고에 뭐가 있는지, 점심에 뭘 먹을 수 있는지는 전혀 안중에 없다고 했다. 이것이 남녀의 차이인지 성향이 차이인지에 대해 우린 한참을 얘기 나눴다.

농촌에서의 성역할은 도시보다 더 보수적으로 구분되는 것이 현실이다. 마을 행사가 있으면 여성들은 대부분 먹을 거 해내느라 바쁘고, 집안 살림은 여성의 몫인 것이 당연하다. 마을잔치부터 농업인의 날 행사까지도 부녀회원들이 챙겨 주는 음식을 먹고 있자면 항상 마음이 불편했다. 물론 행사에서 남성은 주어진 다른 역할을 한다. 남성이 역할을 안 한다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음식 마련을 비롯한 살림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여성의 역할로 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말이다.

그런데 고령화와 지역소멸 위기라는 사회현상은 그런 농촌의 풍경도 조금씩 바꿔 놓고 있다. 농민회 행사에 뷔페를 부르는 것이 자연스러워지고, 마을에서는 여름 복달임도 조금씩 식당에 맡기는 추세다. 사람 자체가 줄고, 일할 젊은 사람은 더 줄고, 그동안 음식하던 부녀회 회원들은 다 돈 벌러 가야 해서 더 이상 행사에서 음식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혼자 사느라 잘 못 챙겨 먹는 남성이 안쓰러워 ‘어여 장가가서 마누라가 챙겨 주는 밥 얻어먹으라’는 말은 더 이상 농촌 현실에 맞지 않는다. 여성이 밥과 집안 살림을 챙겨 줄 거라 기대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사실 살림을 누가 할 것인가 역할을 나누게 되는 것은 성별의 차이가 아니라, 경험과 학습의 차이로 인한 인식과 습관의 차이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집안일도 꽤나 힘이 필요하고, 남성이지만 살림을 곧잘 하는 사람도 많고, 자기식 대로 하고 싶어서 본인이 직접 하는 사람도 있다. 나처럼 소질도 재미도 없지만 혼자 사니 어쩔 수 없이 하고 있는 여성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게 질문한 후배처럼 음식과 살림이 재미있어 기꺼이 자기 역할로 받아들이는 여성도 있을 것이다. 주변을 둘러보면 집안일을 누가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남성, 여성이라는 구분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 보인다. 이미 인식이 바뀌기도 했거니와 대부분의 젊은 친구들은 집에서도 살림을 하거나 배우지 않았을 것이고, 학교에서 청소를 직접 하지도 않았으며, 도시락 대신 급식을 받고, 가정기술과 같은 교과과목은 선택사항이다. 대부분 경험이 없다는 얘기다. 많은 도시 청년을 먹여 살리는 것은 편의점과 배달음식이다.

그러니 이제 농촌에서 살겠다는 사람들은 살림을 배워야 한다. 퇴직하신 어르신이 살림은 생존이라고 하셨는데 농촌에서는 정말 그렇지 않을까 싶다. 농촌은 새벽배송은커녕 배달음식도 안되고, 119도 늦게 오고, 수리기사 방문도 어렵다. 도시에서 아파트에 산다면 많은 것이 전화 한 통이면 해결된다. 관리사무소는 겨울에 수도가 얼어도 와서 해결해 주고, 베란다 창틀이 덜렁거린다고 하면 고정시켜 준다. 집에 벌집이 생기거나 야생동물이 출몰하면 119가 출동해서 해결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농촌은 그렇지 않다. 서비스는 없다. 웬만한 건 혼자 알아서 해야 한다. 거기에 살림과 돌봄도 물론 포함된다.

그래서 나는 이제 살림은 물론이고, 농장을 꾸리게 되면 간단한 집수리를 배워야겠다고 생각한다. 어릴 적, 세 명의 오빠를 두고 굳이 나를 불러 집안일을 시키는 엄마에게 나는 자식을 낳으면 엄마처럼 차별해서 키우지 않겠노라고 툴툴대며 많이 대들었다. 돌이켜 보면 오히려 그런 경험에 감사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덕분에 어디 가도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이 길러졌던 것 같다. 그리고 그때 살림에서 제외된 오빠들 중에 혼자 사는 오빠는 나보다 살림을 더 잘한다. 결국 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다 하게 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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