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떠나지 않겠소”

  • 입력 2023.10.22 18:00
  • 수정 2023.10.22 19:34
  • 기자명 이광재 작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집안 걱정을 하는지 사람들이 한둘씩 흩어져 이양선을 따르는 무리는 이제 반 토막이나 다름없었다.

“넌 이름이 무어냐?”

“다금발이요. 아저씨는요?”

“난 김필상이다. 전라도 금구에서 왔지.”

좌강돈대와 가리산돈대를 무인지경으로 통과한 포함이 갑곶진에 이르러 갑자기 쾅, 쾅 포를 쏘았다. 좌현이 연기에 휩싸이며 포탄이 성곽을 넘어가자 흙더미가 치솟고 어떤 것은 건물을 때렸는지 목재와 기와 조각이 솟구쳤다. 방포는 몇 번 더 이어졌는데 조선 병사들이 개미 떼처럼 쏟아져 나와 줄행랑을 놓았다.

“쳐 죽일 놈들!”

필상이 이를 갈자 다금발이가 쳐다보았다.

“어느 쪽이 그리 미우세요?”

“다 밉지 이눔아.”

선착장에 정박한 이양선에서 양이들이 하선해 총을 쏘며 갑곶진으로 돌격하였다. 그러나 진이 빈 것을 깨닫고 각자 흩어져서 경계하더니 일대는 싣고 온 물건을 내리고 다른 일대는 성루에 올라 보초를 서고 나머지는 갑창과 부속건물을 털었다. 진 안에는 들 수도 없으려니와 아무리 큰 굿판이라도 끝은 썰렁하게 마련이라 필상과 다금발이도 그쯤에선 걸음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염하를 따라 옷골에 돌아와 보니 김진사네 집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았다. 지난번 이양선이 출몰했을 때 뒷산에 마련해둔 토굴로 다들 대피했을 거라고 다금발이가 입을 비쭉거렸다.

오후부터 시작된 비가 밤이 되어 천둥과 함께 굵어지자 김진사네는 쫄딱 젖어 귀가하였다. 비는 줄기차게 쏟아지다가 새벽녘에 잦아들었지만 청국 물건은 넘기지도 못한 채 섬에 갇히게 될까봐 한서방은 잠을 이루지 못하는 눈치였다. 뜬눈으로 새다시피 한 필상과 한서방이 조반 후 한 죽 태우는데 이번에는 부성 쪽에서 콩 볶는 소리가 들려왔다. 김진사댁 식구들은 다시 토굴로 떠난다고 야단이었으나 필상은 단도를 허리춤에 찌르며 객방을 나섰다. 그가 대문을 나서자 무슨 생각인지 다금발이가 슬쩍 붙어 따라왔다. 난리 통에 집안의 잡일이며 심부름에서 놓여나 녀석은 도리어 신이 난 모양이었다. 길을 모르는 터에 잘 되었다 하면서 대문고개에 올라서자 보따리를 이고 진 피난민이 남부여대하여 밀려 내려왔다.

“어찌 된 일이오?”

필상은 지나가는 사람을 잡고 말을 시켰다.

“말도 마시우. 양이들이 성곽을 넘어 관아를 들쑤시는 바람에 시방 난리가 났습니다.”

“수성군은 뭘 했길래 성곽을 넘는단 말이오?”

“총 몇 방 놓고 도망치기 바쁜 터에 누가 성을 지키겠소. 유수(留守)라는 자까지 어진을 말아 도망쳤으니 말 다했지요. 당최 들어갈 생각일랑 마시우.”

그 말에 필상은 길을 재촉해 부랴부랴 부성 남문 안파루를 통과하였다. 어른 걸음에 맞추느라고 뛰다시피 걷던 다금발이가 물었다.

“선비님은 봉변이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남들과 반대로만 가세요?”

“이눔아, 봉변은 무슨 봉변.”

“총이라도 맞으면 어쩌시게요.”

“그런 너는 어째 따라오느냐?”

녀석이 이를 드러냈다.

“선비님하고 같이 있으면 재미도 있고 안심이 돼요.”

이번에는 필상이 씩 웃었다.

“이놈아, 선비님이라고 하지 말어라. 난 선비도 뭣도 아니다.”

“그럼 무엇이게요?”

“떠돌이 나그네지.”

사거리에 이르자 서양 병사의 호위를 받아 궤짝을 싣고 서문을 빠져나가는 마차가 보였다. 다른 사람은 부성을 탈출하고 거동이 불편한 늙은이들만 삽짝 뒤에 서서 약탈 행렬을 엿보고 있었다. 마차는 조선인 부역자가 몰았으며 어떤 수레에는 책이 가득하고 아문과 창고를 털었는지 총창이 무수하였다. 수레와 마차는 동쪽과 북쪽 대로에서도 줄줄이 내려왔고, 그를 호위하는 적병은 질서정연할 뿐 아니라 기개가 사나워 보였다.

필상과 다금발이가 노상에서 지켜보지만 아무 일이 없자 지팡이에 의지한 노인 몇이 울 밖으로 나왔다. 우마차를 호위하던 병사들이 총을 내려 앞에 총을 하는데 모자 밖으로 노란 머리가 비치는 적병 하나가 구경꾼을 향해 휘익 휘파람을 불었다. 궁과 아문과 창고의 물자는 서문을 빠져나가 갑곶진에 차곡차곡 쌓였다.

“양이들이 배를 타고 온 것은 다 도적질을 하려는 속셈이네요.”

대문고개를 되돌아올 제 다금발이가 맥 풀린 소리로 말하였다.

“그런가부다.”

“서학을 한다는 신부들은 그럼 도적의 앞잡이일까요?”

“글쎄다.”

“헌데 양이들은 부자라면서 왜 조선까지 와서 빼앗아가죠?”

“나도 그것을 좀 알아봐야겠다.”

그들이 옷골에 돌아와 보니 짐바리가 실린 우마차 두 대가 대문 앞에 서 있었다. 필상이 객방으로 달려가자 행담을 멘 한서방이 반겼다.

“어딜 갔다 이제 오는가. 김진사댁 식구들이 배편을 마련해 피난을 간다고 기다리고 있네. 선두포에서 대기한다니 채비하시게.”

필상의 눈꼬리가 옆으로 째졌다.

“재산을 헐어 싸우지는 못할망정 도망을 친단 말이오?”

“양이들은 화력이 우수한데 어찌 당하겠나. 가족은 물론이요, 하인까지 데리고 간다니 그나마 인정이 아닌가. 누구 집을 지켰으면 하는 눈치지만 그러겠다 할 놈이 뉘 있는가. 얼른 채비하시게.”

김진사네는 벽란나루를 거쳐 평산 땅의 일가붙이를 찾아간다지만 한서방은 곧장 한양으로 가겠다는 것이었다. 한서방을 따라 대문을 나선 필상은 대열을 질러 김진사댁 장남을 찾아냈다.

“저는 떠나지 않겠습니다.”

필상을 쳐다보는 그 댁 장남이 피곤한 기색을 드러냈다. 무과에 입격하여 한때 훈련도감에서 첨정(僉正)을 지냈다는 차남이 끼어들었다.

“다시 생각해보시오. 난이 진정되기 전엔 섬을 떠나지 못할 게요.”

“난 떠나지 않겠소.”

필상이 재차 남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마님, 저도 선비님을 모시고 집을 지키겠습니다.”

언제 달려왔는지 다금발이가 형제를 보며 간청하였다.

“혹시 화승총을 다룰 줄 아시오?”

“고향에서 사냥을 좀 하였습니다.”

“받으시오. 내가 아끼는 물건이오.”

그가 내민 것을 받아들고 보니 묵직하였다. 차라리 잘 되었다는 듯 형제는 목례를 남기고 피난 행렬에 몸을 묻었다. 집에 돌아와 필상과 다금발이는 객방을 데운 후 네 활개를 펴고 드러누웠다. 다금발이가 찾아온 소주를 양껏 들이켠 끝이라 근심걱정은 사라지고 다만 만사가 허탈해져 필상은 비질비질 웃었다. 노을이 드리워지자 세상은 핏빛이 되었다.

그날 이후 필상과 다금발이는 밥을 지어먹으면 훈련도감을 싸고 도는 야산에 올라갔다. 여흥민씨가의 무덤을 돌아 송림을 헤치면 바위가 나타나고 밑은 깎아지른 낭떠러지라 매의 시선이 될 수 있었다. 그곳 매바위에선 갑곶돈대와 갑곶진이 한눈에 내다보이고 흐름이 바뀌는 염하의 물길과 그 건너 문수산성이나 장대가 성큼 다가들었다.

적병이 부성을 떨어뜨린 후 관원과 군졸이 도망가버려 강화도는 목을 틀어 잡힌 뱀 같은 신세였다. 프랑스군의 로즈 제독은 원정군 길잡이 리델 신부와 조선인 신자 최인단을 내세워 갑곶진 앞에 장을 세우라고 요청하였으나 부민들이 듣지 않자 군사를 동원해 가축을 끌고 갔다. 피난을 가지 못한 부민 중에는 굶주리는 자가 속출하였고, 배고픈 아이들은 프랑스군을 따라다니며 빵부스러기를 주워 먹었다.

기강이 흐트러진 적병은 여인을 겁탈하기도 했는데 황이천이라는 선비의 부인이 능욕을 당하고 심선달의 아낙이 화를 입었다며 입에서 입으로 말이 돌더니 어떤 여인은 끝내 죽임을 당했다는 소문이 옷골까지 날아들었다. 그런가 하면 횃불을 들고 반가에 불을 지른 혐의로 프랑스군 손에 잡혀간 조선인도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갑곶진과 부성에 웅크린 날이 많아 오리 사냥할 때 빼고는 총성이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포성이 들려와 필상과 다금발이는 먹던 숟가락을 내던지고 매바위에 오른 참이었다.

저작권자 © 한국농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