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방포소리 아닙니까?”

  • 입력 2023.10.15 19:03
  • 수정 2023.10.20 09:36
  • 기자명 이광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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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관의 재촉에 나졸이 꾸러미를 풀었다. 속단이며 녹각을 뒤적이던 군관이 나졸에게 턱짓하자 다시 포장을 하는데 솜씨가 시원치 않았다. 기창이 대신 포장한 꾸러미를 병호에게 건네자 군관이 말하였다.

“나중에 경을 칠 일이 있거든 그때나 한번 뵈입시다. 가보슈!”

무리에서 빠져나온 기창이 걷다 말고 뒤를 보았다.

“나장님네들! 거 붙잡거든 살살 치시구려. 농사철이 아니오.”

감곡천을 따라 뛰듯 걸었는데도 중화참 지나서야 거야마을에 닿았다. 병호는 이모할머니에게 큰절을 올리고 사랑채 쪽방에 봇짐을 풀었다. 해 안에 돌아가야 하는 기창이 길을 서두르는 기색이라 물 한 모금 마시고 내처 길을 나섰다. 들 왼편 야산에 어른 여럿이 둘러도 닿지 못할 느티나무가 서있고 우회하자 종정마을이 나타났다. 송진사는 남도의 일자집 사랑에서 서안을 앞에 두고 부자를 맞았다. 허공의 횃대와 시렁은 휑하였으며 향상에는 벼루며 지필묵이 가지런하였다. 병호가 자리에 엎드리자 송진사가 돋보기를 벗었다.

“먼 길인데 새벽같이 나섰겠습니다.”

“길이 좋아 수월하였습니다.”

송진사가 이번에는 병호를 보았다.

“『소학』은 막힘없이 암송하느냐?”

“그러합니다.”

“혹여 형이상(形而上)과 형이하(形而下)가 무엇인지 아느냐?”

소학권이 아닌 엉뚱한 질문에 병호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답하였다.

“『역경』에 나오는 말로 형상 이전의 것을 도라 하고 형상 이후의 것을 만물이라(形而上者謂之道 形而下者渭之器) 하였습니다.”

“형상으로 드러나지 않는 원리를 형이상이라 하겠지. 그러면 머리 아프게 왜 형이상을 궁구하느냐?”

“세상만물의 이치를 뚫어 궁극의 원리를 깨닫기 위함이라 들었습니다.”

수염자리도 들어서지 않은 녀석의 답변이라 놀랄 법하건만 송진사는 고개만 주억거렸다.

“맞다. 연이 허공에서 돈다고 어찌 실을 잡은 사람까지 돈다 하겠느냐. 만물은 변해도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 있는 법이다. 사물의 극단을 파고 들면 엄청난 극단에 이르게 되니 이것이 곧 태극이다. 그래서 주자는 모든 존재가 그것이게 하는 근본이 태극임을 설하였느니라. 그 원리를 학습할 때 종지가 바로 섬을 알아야 한다. 나는 출사보다 경서를 읽고 궁구하는 일에 쾌가 있음을 알았다. 하지만 넌 다르게 살 동량임이 분명하다. 문과는 사서의(四書疑)든 오경의(五經義)든 대문(大文)에서 출제하므로 초집(抄集)을 외우는 것으로 학문을 삼는 자도 있다 들었다. 그리하면 빨리 입격도 할 터이지. 너는 빠른 길로 가겠느냐, 경서를 읽고 기초를 튼튼히 하겠느냐?”

“성곽 쌓듯이 차근차근 하겠나이다.”

송진사는 이제 병호만을 상대하였다.

“양이들이 청국의 수부(首府)에 난입하여 원명원을 불사르고 또 다른 양이는 우리와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왜국도 양이에 굴복하였다 하니 저들은 어찌 이다지도 횡포하단 말이냐? 그럴수록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정기를 굳게 세워야 하거늘 모범답안 따위로 나를 속이고 시관을 속이고 성상을 욕보이겠느냐? 젊고 강직한 선비가 쏟아져야 사직은 유지될 것이다.”

담뱃진을 긁어 올리듯 성대를 쥐어짜는 소리였다. 벌써 땅거미가 내려 창호지가 누르스름하였다.

“내일부터는 조식을 마치면 곧장 찾아오너라.”

첫 대면을 가름하자는 뜻으로 알고 병호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근실히 따르겠습니다.”

2장 한로삭풍 요란해도(1866)

전라도 금구현의 수류면에서 나고 자란 김필상은 십 년간 읽던 경서를 내던지고 스무 살이 되자 십 년간 주유하리라 하면서 조선 팔도 구석구석을 떠돌았다. 병인년에는 북관을 주유하였는데 황주 동선령을 넘어 남으로 내려올 적에 한양 사는 한서방과 길동무를 하게 되었다. 행색은 초라하지 않지만 장돌뱅이라길래 이상하다 하였더니 한서방은 대갓집에 특이한 물건을 대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마침 청국에서 구한 물건을 강화도 김진사댁에 넘기러 간다면서 동행을 요청하므로 필상은 섬 구경도 할 겸 벽란나루에서 그와 함께 배를 탔다.

필상이 한서방과 찾아간 곳은 강화도 남쪽 김진사댁으로 인정면 옷골에 있었다. 대대로 강화도에 살면서 벼슬도 하고 축재도 해온 안동김씨가였는데 한 곳에 사대가 모여 사는 다복한 집으로 노비를 합해 식솔만 육십 명에 달하였다. 해질녘에 도착해 김진사는 만나지 못하였지만 푸짐한 저녁을 대접받은 두 사람은 소년의 안내를 받아 깨끗이 치워진 객방에 들었다. 그날 목욕물까지 데워주는 칙사 대접을 받은 뒤 세도가의 위세가 높기는 높은 모양이라고 희희덕대며 그들은 뜨끈한 구들에 몸을 지졌다.

“이거 방포소리 아닙니까?”

어디선가 들려온 소리에 잠을 깨고 보니 이른 아침이었다.

“방포소리라니?”

눈을 뜬 한서방이 자리에서 일어날 즈음 먼 데서 천둥 치는 우르릉 쿵쿵 소리가 들렸다. 계속해서 지지고 볶다가 잠잠해지는데 바깥 섬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필상이 옷을 걸치고 나서자 청지기로 보이는 사내가 사랑채로 뛰어가며 외쳤다.

“아마도 영종도에서 나는 소리 같습니다.”

“이양선이더냐?”

사랑에서 가래 끓는 소리가 나왔다.

“그런가봅니다.”

“그들이 올라온다더냐?”

“확인하고 다시 고하겠습니다.”

청지기는 밖으로 나서고 객방에 돌아와 보니 한서방이 소식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툇마루에 앉으며 이양선이 나타난 모양이라고 일러주자 대통에 연초를 쟁이던 한서방이 손을 떠느라고 반 넘게 가루를 흘렸다. 필상이 넘겨받아 꾹꾹 눌러 담아주니 그제야 부시를 치고 볼이 패도록 물부리를 빠는 것이었다. 다시금 천지를 흔드는 소리와 함께 기왓장 밑의 흙 부스러기가 우수수 떨어졌다. 이번에는 다른 하인이 사랑채 중문을 넘어갔다.

“이양선이 광성보에 포를 쏘고 있습니다.”

필상이 따라가 보니 김진사로 보이는 늙은이가 마루에 서 있고 아들로 보이는 사내들이 댓돌 밑에서 웅성거렸다.

“상륙을 했다는 것이냐, 포만 쏜다더냐?”

“광성보는 성곽이 높은지라 염하를 따라 북상할 모양입니다.”

“터진개를 통과하진 않은 게로구나. 다시 보고 오너라.”

“예.”

이번에는 사태를 직접 보리라 하면서 필상은 돌아서는 사내를 따라갔다. 대문을 나설 무렵 객방을 안내하던 소년이 나타나 앞서 달리므로 뒤꼭지를 보면서 뛰었다. 마을은 집에서 나와 허둥거리며 발을 구르는 자와 주저앉아 우는 아낙네, 물정 모르고 짖어대는 개와 어딘가로 몰려가는 애새끼들까지 그야말로 난리법석이었다.

떠꺼머리 소년을 놓치지 않으려고 개울에 놓인 징검돌을 바짓가랑이 적시며 건너자 추수 끝난 들이 나왔다. 논으로 뛰어들고부터 벼 그루터기가 미투리를 찔렀지만 몰려가는 사람들 틈에서 필상은 아픈 줄을 몰랐다. 들을 가로지르자 둔덕도 아니고 산도 아닌 등성이가 나타나 단내나도록 올라서고 보니 용당돈대와 통진 땅이 잡힐 듯 다가들었다. 김진사가 말한 터진개인지 땅은 염하 가운데로 뿔처럼 뻗어나가고 건너편 내륙은 물길이 파먹어 남쪽 바다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

“이양선이다!”

잠방이를 입은 아이가 군중 속에서 외쳤다. 용당돈대 뒤에서 과연 이양선이 선수부터 나타나는데 좌현에 포신이 장착돼 있고 가운데 굴뚝에서는 검은 연기가 솟구쳤다. 포함이 터진개를 빠져나가자 이번에는 화선 세 척이 따라 나와 사람들 발치를 통과해갔다. 포함에만 포가 장착되었을 뿐 뒤를 따르는 배에는 몸에 붙는 군복 차림에 총을 든 병사들이 도열해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섰던 무리의 어떤 사내가 전어를 잡으러 갔다가 작약도에 정박한 다른 이양선을 목격했노라 침을 물었다. 염하는 수심이 얕아 못 들어오지만 작약도의 이양선은 돛대만도 세 개나 되며 굴뚝은 용오름처럼 우람하더라는 것이었다. 조선 측 포대에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이양선은 제집 마당인 양 물길을 거슬러 북상하였다.

“저놈들은 유람을 나온 꼴이 아닌가?”

소년과 북쪽 산록을 내려서며 필상이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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