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가라앉는 가을

  • 입력 2023.10.15 18:00
  • 수정 2023.10.15 19:08
  • 기자명 정성숙(전남 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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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숙(전남 진도)
정성숙(전남 진도)

어제는 텃밭을 정리하느라 온몸이 땀으로 흥건했는데 오늘은 들에 나오니 겉옷 하나를 더 입고 싶은 날씨다. 가을이라는 계절이 펼쳐진 모양이다. 농사꾼은 봄에 바빠야 가을에 볼일이 있다는데 올해의 봄과 여름은 정말 혹독한 시련을 줬다. 봄에는 갑자기 따뜻했다가 다시 추워져서 과실수의 꽃눈이 우왕좌왕 갈피를 못 잡게 했다. 여름에는 몇 번의 폭우, 무엇 하나 남기지 않고 다 쓸어버리고 말겠다는 다짐이라도 한 듯 앙갚음을 품은 빗줄기였다. 덕분에 배 터지게 애를 썼지만 계산상으로 별 볼 일 없는 농사꾼의 가을이다.

이곳의 밭작물은 대파 일색이다시피 했는데 작년에 대파 가격이 좀 오르자 무관세 수입으로 생산비를 건질 수 없게 대파 가격이 주저앉았다. 대파를 생각하면 진저리가 쳐진다.

더 이상 잘 지을 수 없이 최상의 대파를 키웠다. 기대 또한 같이 키워졌다. 대파 가격도 받쳐 주고 상품성도 좋으니 빚을 좀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태풍으로 대파가 쓰러지더니 뒤이어 닥친 태풍으로 아예 드러누웠다. 초겨울에야 겨우 몸체를 세워서 일어났다. 겨울에 한 번의 폭설로 대파가 다시 몸져누웠다. 여름에 쓰러진 대파는 가을쯤에는 서서히 일어서는데 겨울에 누운 대파는 기회가 없다. 상품성과는 영영 이별을 한 셈이다. 허탈 그 자체였다. 최선을 다한다는 노력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같았다.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이라는데 뭘 그리 안달복달하는지. 쇠비름 한 포기라도 눈에 보일라치면 큰일이라도 생긴 것처럼 부리나케 달려가서 뽑아내고 혹여 빈 곳이 있으면 다른 포기에서 솎아 와서 심어줘야 직성이 풀리는, 어쩔 수 없는 일꾼 근성이 징그러워졌다.

갱년기 증상처럼 자꾸 화가 났다. 해소되지 못한 불안이 용암처럼 끓기만 했다. 일꾼들과 참깨를 터는 날에 남편이 2시간이면 무슨 회의를 마치고 온다더니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끓는 죽 솥뚜껑 열리듯 울화통이 터졌다. 주위에 사람이 있든 말든 전화기에 대고 큰소리로 욕바가지를 퍼부었다. 깜깜해서 집에 들어와 김치찌개라도 끓여서 저녁을 먹으려는데 점화가 잘 되지 않던 가스레인지는 기어이 수명을 다했다. 게다가 밥솥의 밥마저 중간에 김이 샜는지 푸석하게 익다 말았다. 밥솥까지 내 속을 긁었다. 마무리하지 못한 일감들은 날마다 나를 덮치는데 친구들 모임 날짜는 왜 그리 잘도 찾아오는지. 농사일이 바빠서 이번에도 참석하지 못한다는 메시지를 남기는 손가락에도 짜증이 묻어 있었을 것이다.

최근 2~3년 사이에 들녘의 풍경이 변하고 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만 봐도 놀라는 심정들이 비슷했는지 작목전환 바람이 불었다. 대파 대신 고추나 다른 작물을 심고 겨울배추를 심은 농가가 늘었다. 우리는 참깨를 심어 여름에 수확하고 겨울배추를 심었다. 올해 참깨 농사는 비 때문에 거의 망하다시피 했는데 우리는 참깨 농사를 잘 지은 셈이었다. 잘된 농사였지만 인건비 계산하고 나니 남는 것이 없었다. 그냥 빈 밭으로 놔뒀다가 느긋하게 겨울배추나 심었더라면 지글지글 몸을 태우던 여름에 남편과 지글지글 뜨겁게 싸울 일도 없었을 텐데.

겨울배추를 심기 전에 계약을 했다. 배추를 심은 후에 물 관리는 우리가 하고 나머지 과정, 농약과 웃거름 그리고 배추를 끈으로 묶는 일까지 상인이 한다는 내용이었다. 배추를 심은 지 며칠 후에 계약금 일부를 받고 나니 수시로 내 속을 휘젓던 불안이 수그러들었다. 일과 비용 부담이 줄었기 때문이다.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2개월 동안의 일감이 나뉘었다.

널뛰기하는 농산물 가격에 대한 기대보다 만족스럽지 않더라도 안정적인 소득이야말로 가족과 나의 평화에 결정적임을 실감했다. 요동치던 맥박이 비로소 가라앉는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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