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한지(韓紙)⑧ 창문 바르는 날

  • 입력 2023.10.08 18:00
  • 수정 2023.10.08 20:46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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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이상락 소설가

아무리 가난한 집이라도 추석 명절을 앞두고는 방문의 창호지를 새로 발랐다.

음력 7월의 어느 일요일, 아침밥을 먹고 나자 아버지는 이 방 저 방의 문짝들을 분리해서는 마당의 평상에다 걸쳐 놓았다. 큰방 작은방 할 것 없이 앞뒷문을 모두 문틀에서 뜯어낸 것이다. 방문은 늘 그 자리에 고정돼있는 것으로만 알고 있던 어린아이들에게는, 암수가 결합돼 있던 돌쩌귀를 훌쩍 벗겨내어 순식간에 문짝을 분리해버린 아버지의 동작은, 무슨 요술을 부린 것만 같았다.

-퍼뜩 나와서 문종이 벗겨라!

평소엔 창호지 문에 작은 구멍이라도 낼라치면 호된 지청구로 욱대기던 아버지가, 오늘은 어인 일로 문종이를 찢어도 좋다고 한다. 아이들은 파리똥 자국 등으로 얼룩진 문종이를 마구 찢어내면서 괜히 신이 났다.

“추석 돌아오기 전 음력 7월에 볕 좋은 날을 잡아서 방문을 새로 바르거든요. 창호지는 본시 바람을 막아주는 방풍지(防風紙)이기 때문에, 우리 지역에서는 이때 문종이를 새로 바르는 것을 ‘칠월 방풍’이라고 했어요. 가을 찬바람 나기 전에 그 일을 해야 하거든요. 하지만 그게 마냥 쉬운 작업은 아니었지요.”

서암리 마을 최지흠 할아버지의 얘기다.

아이들은 처음 헌 문종이를 북북 찢어내면서는 그저 신바람이 나지만, 문살에 달라붙은 종이 더께를 떼 내는 일은 애들이 할 몫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바가지로 물을 뿌려서 충분히 불린 다음에, 일일이 칼로 벗겨내야만 했다. 어머니는 부엌에서 밀가루 풀을 쑤고….

방문의 문짝도 여러 모양이었다. 길쭉한 여닫이 방문이 있는가 하면 조그만 봉창 문이 따로 있었다. 창의 살대도 한 가지가 아니었다. 긴 세로줄에 위아래만 가로줄이 있는 ‘띠살문’이 있는가 하면, 바둑판처럼 가로 세로가 모두 촘촘하게 짜인 방문도 있었고, 가는 살대를 이쪽저쪽 사선으로 건너질러 무수한 마름모꼴을 만들고 있는 교창살의 문짝도 있었다.

창호지를 바르는 작업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풀비에 밀가루 풀을 묻혀서 종이에다 먼저 칠한 다음에 문살에 바르면, 마르고 난 뒤에 풀 덩어리가 여기저기 얼룩져서 보기에 흉할 뿐만 아니라 쪼글쪼글한 모양으로 되기 십상이다. 따라서 반드시 풀칠은 문살에다 해야 한다. 그러자니 가느다란 댓가지를 마름모꼴로 교차해서 만든 교창살의 경우엔 문종이 바르기가 여간 어렵지가 않았다.

아버지가 새로 사온 창호지를 문짝의 크기에 맞춰 가위로 잘라낼 때면, 아이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침을 꿀꺽 삼킨다.

-아부지요, 잘라내고 남은 창호지는 인자 내가 갖고 가도 되지예?

아이의 머릿속에서는 벌써 그 자투리 창호지로 만든 가오리연이 창공을 날고 있는데….

-택도 없는 소리 말그라. 자투리도 다 쓸모가 있는 기라. 문풍지 달아야 한다카이.

“요새는 집 지을 때 반듯하게 각이 잡히고 아귀가 딱딱 맞게 문틀을 만드니까 바람이 안 통하는데, 옛날 집들은 얄궂게 지어 놔서 집도 틀어지고 문틀도 틀어지고….

당시의 초가집들은 얼기설기 지었기 때문에, 더러는 문틀 자체가 비뚤어져 있어서, 창호지를 새로 발라 문짝을 달아놔도 휑하니 틈이 생겼다. 여름철에야 상관없으나 겨울이면 그 틈새로 황소바람이 들이닥쳤다. 그 틈새 바람을 막으려고 다는 것이 바로 문풍지였다.

문을 바르고 남은 창호지 자투리의 쓰임새는 또 있었다. 창호지를 가늘게 잘라 두어 겹 잡은 다음에, 석유 등잔의 뚜껑에 끼워서 심지로도 썼다.

어머니가 쑨 밀가루 풀로 새 창호지를 바르고, 다시 가을볕 한 자락을 쐐서 말린 다음, 드디어 문짝을 문틀에 결합하고 나서 문풍지까지 달고 나면 ‘칠월 방풍 작업’이 끝난다. 여유를 부릴 줄 아는 사람들은, 손을 자주 타서 찢어지기 쉬운 문고리 근처에다 손수건 크기의 창호지 조각을 덧대어서 이중으로 바르기도 했는데, 그 사이에다 말린 풀잎이나 꽃잎을 넣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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