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복지 도약’ 눈앞에서 망설이는 EU, 무슨 사정일까

EU 집행위, ‘우리 없는 사육’ 이행 약속 뒤로하고 침묵

  • 입력 2023.10.05 19:12
  • 수정 2023.10.07 23:07
  • 기자명 한우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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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한우준 기자]

지난달 13일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서 열린 유럽의회에서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이 국정연설에 나서고 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제공
지난달 13일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서 열린 유럽의회에서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이 국정연설에 나서고 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제공

 

동물복지 부문에서 선도적으로 의제를 수용하고 정책 수립에 나섰던 유럽연합(EU)이 최근 또 한 번의 ‘도약’을 앞두고 갑자기 발을 빼려는 모습을 보여 유럽이 요동치고 있습니다. 산란계나 암퇘지 등의 우리(케이지) 사육을 완전 금지하겠단 계획을 세워두고선 최종 실행을 앞두고 ‘유턴’을 해버린 건데, 그간 어떤 일이 있었는지, 왜 그렇게 됐는지 정리해봅니다.

우리나라 지방자치법에 ‘주민발의제도’라는 것이 있지요. 인구 대비 일정 비율의 주민 동의서명을 받으면 의원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주민이 직접 의회에 조례안을 제출할 수 있는 제도입니다. 농업계에서는 농민들이 이 제도를 활용해 ‘농민수당’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성과를 내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선 아직 국회 입법은 불가능하지만, 일단 박주민 의원이 작년에 대표발의한 ‘국민입법청구법안’이 계류 중이긴 하네요.

이 제도를 선제적으로 도입한 유럽의 경우, 이미 지난 2012년부터 유럽의회 단위의 ‘시민발의제도’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발의 조건만 충족한다면 전 대륙에 영향을 미칠 법안을 주민 스스로 입법 테이블에 올릴 수도 있는 거지요. 지난 2019년에는 의원들이 시민발의안을 함부로 무시할 수 없도록 제도를 좀 더 유연하게 고치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경과는 이렇습니다. 유럽 내 동물권 단체들이 이 제도를 활용해 지난 2018년 ‘우리 사육의 시대를 끝내자(End the Cage Age)'는 제목의 유럽시민발의안을 작성하고, 서명을 모으기 시작합니다. 가둬놓고 사육하는 행위, 특히 닭이나 돼지의 우리 사육을 법적으로 완전히 금지해야 한다는 내용이 골자였습니다. 활동가들은 7개국 100만명의 동의서명을 수집해야 한다는 요건을 훌쩍 뛰어넘어, 거의 대부분의 가입국에서 총 140만명의 서명을 끌어 모으는 데 성공합니다.

결국 EU 집행위원회는 지난 2021년 6월 30일, 제출된 법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케이지 사육의 단계적 제한 및 완전 철폐를 목표로 입법 절차를 밟겠다고 ‘화답’합니다. 이는 놀랍도록 확고한 수준의 약속으로 시민발의제도 도입 이후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동물보호단체들은 이를 ‘역사적인 승리’로 기념했고, 유럽 각국의 제도적 변화는 물론 전 세계에도 직간접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당시 EU 집행위원회가 약속했던 상정시한이 바로 올해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지난달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서 열릴 유럽의회를 앞두고 EU 집행위원회가 그 약속을 철회할 수도 있다는 보도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날 의회에서는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의 국정연설이 예정돼 있었습니다. 매년 9월의 연례 국정연설은 향후 EU 집행위원회의 정책 우선순위를 발표하는 중요한 순간입니다.

9월 13일, 폰 데어 라이엔 위원장은 그린딜(EU의 새 탄소중립계획)의 발전적 지속, 우크라이나 문제 해결, 식량안보 등 내년에 수행할 굵직한 의제들을 일일이 나열하면서도 결국 동물복지법 개정에 대한 이야기는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습니다. 같은 날 그의 서명이 들어간 채 공개된 ‘의향서’의 핵심 우선순위에서도 해당 내용이 사라졌습니다. EU 집행위원회가 동물복지법 개정을 연례 국정연설 속에서 ‘언급하지 않는 것’으로 사실상 철회 의사를 밝혔단 해석입니다.

파장은 엄청났습니다. 온갖 비판이 쏟아지는 와중, 서명을 주도했던 ‘세계농업에 대한 연민(CIWF)’은 EU집행위원회가 공장식 축산을 지지하고 수행하는 업계의 로비에 굴복했다며 유럽 민주주의의 따귀를 때렸다(slap)는 표현까지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시민발의 대표의 대리자였던 올가 키쿠는 “오늘 일어난 일은 충격적이다. EU 집행위원회는 로비에 굴복하고 새로운 동물 복지법을 지연시킴으로써 동물들에게 살 만한 삶을 주겠다는 약속을 어겼다”라며 “그들은 시민들의 신뢰를 배반했고 EU 민주주의를 빈 껍질로 만들었다”라고 날선 비판을 날렸습니다.

영국의 경제지 파이낸셜타임즈는 지금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대단위 인플레이션 현상이 EU 집행위원회를 뒷걸음질치게 만들었다고 분석했습니다. 우리 사육을 완전히 금하게 되면 농가의 평균 생산비가 15% 이상 증가해 소비자 물가 상승과 각국의 수입 증가로 이어질 수밖에 없단 분석입니다. EU 집행위원회는 지속되는 추궁과 의혹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이 문제에 대해 명확한 계획을 밝히진 못하고 있습니다. 지난 3일 열린 청문회에서도 답변은 아직 ‘진행중’이었지요.

유럽 정치권은 과연 확언했던 계획을 지킬까요? 아니면, 제도와 민주주의적 장치에 기반했던 약속을 깨면서까지 축산업의 생산성과 식량안보 사수에 나설까요? 여기저기서 유럽의 농정에 크게 영향 받는 우리로선 오는 연말 어떤 결론이 나올지 궁금할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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