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한지(韓紙)⑦ 신방(新房) 엿보기

  • 입력 2023.09.24 18:00
  • 수정 2023.09.24 20:45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상락 소설가
이상락 소설가

서암리 주민들이 가내 수공업으로 만든 닥종이(한지)를 갖고 나가, 신반 오일장의 지전(紙廛)에 쌓아두고 판매를 할 때, 대량으로 구입을 해가는 주 고객은 각 지역의 지물포 주인들이었다. 지물포에서는 다시 소매상인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했는데, 그 소매상인들이 다름 아닌 종이 행상들이었다. 박해수씨의 얘기를 들어보자.

“인구가 어지간히 많은 읍내나 면 소재지 정도 되는 곳이라면 지물포가 따로 있지만, 그보다 작은 마을의 경우엔 잡화점에서 창호지를 조금씩 갖춰놓고 팔았어요. 번듯한 잡화점도 없는 마을에는 종이 장사꾼들이 창호지 묶음을 짊어지고 다니면서 낱장으로 몇 장씩 팔았고요.”

옷감이나 소금이나 양은그릇을 짊어지고 다니며 팔 듯이, 창호지도 그렇게 꾸려지고서 이 마을 저 고을을 돌아다니며 보따리 장사를 했다는 얘기다.

-자, 창호지가 왔습니다! 이 집 안방 문짝은 새로 발라야겠네. 저쪽 건넌방도 문살 틈이 성한 데가 없네그려. 이참에 싹 뜯어내고, 창호지 여남은 장 새로 사서 산뜻하게 개비를 하이소.

-추석도 돌아오고, 문종이를 새로 바르기는 해야겠는데 그럴 형편이 돼야 말이지예. 돈은 없는데…곡식도 받는 기라요?

-아무렴요. 콩도 받고 깨도 받고 뭐든지 다 받십니더.

한지 행상을 하던 사람들에게 가장 난감한 경우는, 종이 꾸러미를 챙겨지고서 산길이나 들길을 가는 중에 갑자기 비를 만나는 경우라 하였다. 미처 피하지 못하고 심하게 젖으면 쓸모없이 망가져 버리기 때문이다.

“오륙십년대만 해도 창호지 몇 장 사려면 큰맘 먹어야 했어요. 창호지가 그만큼 귀했거든요. 심지어 우리 집은 대대로 집안에서 한지를 만들어서 내다 팔았잖아요. 그런데도 저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방문 여기저기에 구멍이 나서 바람이 솔솔 들어오는데도, 선뜻 새 창호지 한 장 갖다가 문을 바르지 못했다니까요. 한 장이라도 더 팔아서 먹고살 궁리를 해야 하니까요. 그랬으니 여느 시골집들은 오죽했겠어요. 외갓집이 합천에 있었는데, 어쩌다 찾아가면 방문이 군데군데 찢어져서 바람이 솔솔 들어오는데도 창호지 구하기가 어려우니까 애들 잡기장을 뜯어서 바르기도 하고, 비료 포대 종이를 오려서 덕지덕지 바르기도 하고…그러니까 방안이 한낮에도 어둠침침했어요.”

그래도 철부지 아이들은 방문에 구멍을 내고 싶은 호기심을 누르기 어렵다. 문살 틈에 구멍을 뚫어놓으면 쓸모가 많았다. 방안에서 형제끼리 무슨 해찰을 피우려 할 때 마당에 어른이 있는지를 정탐하거나, 숨바꼭질할 때 술래의 동태를 감시하는 데에도 요긴하다. 큰놈이 구멍을 뚫고 거기에 눈을 맞추고 내다보고 있으면, 작은놈도 참지 못하고 그 옆에다 침 묻은 손가락을 쑤셔서 구멍을 낸다. 어머니로부터 부지깽이 닦달을 당하겠지만 그건 다음다음 문제다.

그런데 손가락으로 창호지 바른 문에 구멍을 내는 행위가 너그럽게 용인되는 때가 있었다. 신랑 신부가 첫날밤을 치르는 신방을 엿보는 경우다. 조혼(早婚)이 성행했던 조선 시대에, 어린 신랑 신부가 그 거룩한 행사를 무난하게(?) 잘 치르는지를 살펴보기 위해서 그 이상야릇한 풍습이 비롯됐다는 설이 유력한데…이때 창호지에 구멍을 내는 사람은 어린아이들이 아니라 다 처녀 총각들이었다.

-야, 드디어 신랑이 신부 족두리를 벗겼어. 신랑 떨고 있는 거 좀 봐, 히히히.

-저리 좀 비켜봐. 나도 좀 보게. 안 되겠다. 나도 구멍을 하나 더 뚫어야지.

-어? 옷고름 푸는 것도 못 봤는데 벌써 불을 꺼버리면 어떡해!

밀고 밀리고 하다가 방문의 돌쩌귀가 빠지는 바람에 구경꾼들이 문짝과 함께 신방 안으로 와장창 넘어지는 경우도 드물게는 있었다.

구멍을 내지 않더라도 창호지 문은 방안의 풍경을 외부에 비춰주는 거울 구실을 하기도 했다. 밤늦도록 바느질이나 다듬이질을 하는 여인네의 그림자가 은은하게 창문에 어리는 정겨운 모습을 더는 구경할 수가 없게 되었지만.

저작권자 © 한국농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