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령군 서암리 주민들은 각기 ‘가내 수공업’ 방식으로 생산한 닥종이(한지)를, 어떤 방식으로 내다 팔아서 생계 수단으로 삼았을까? 무엇보다 닥나무 껍질을 벗겨서 매우 고단한 단계 단계를 거쳐 빚어낸 그 닥종이들은 시장에서는 어느 만큼의 가치로 거래가 되었을까?
1950년대 말의 어느 날, 인근 오일장에 닥종이 팔러 가는 서암리 주민의 뒤를 따라가 보자.
-최가야. 오늘 신반 장날인데 종이 팔러 안 갈끼가?
-가야제. 벌써 지게에 종잇짐 다 꾸려 놨다 아이가.
-최가 너그는 이번에 많이 했제? 얼마나 갖고 나가노?
-이번 장에는 두 동 갖고 나갈 끼다. 값이나 잘 받아야 할 낀데….
-두 동이면 많이 했네. 내는 한 동 반밖에 몬했다. 종이 팔거든 막걸리나 한 잔 사그라.
그 지역 일대에서 가장 크게 열리는 오일장은 부림면 신반리에 있는 신반장이었는데, 그 오일장은 무엇보다 서암리 사람들이 닥종이를 짊어지고 나가 꾸리는 지전(紙廛. 종이 가게)으로 유명했다. 앞에 소개한 주민들의 대화에서 ‘한 동 반’이니 ‘두 동’이니 하는 말이 나왔는데 닥종이, 즉 한지를 세는 단위가 어떻게 되는지 최지흠 할아버지(1928년생)의 설명으로 들어보자.
“닥종이 스무 장을 포개서 접어놓은 것을 한 권이라 하고, 열 권을 묶어서 포장해 놓은 것을 한 축, 그리고 한 축짜리 묶음 열 개를 한 데 묶어놓으면 그걸 한 동이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창호지 한 동은 낱장으로 따지면 2천장이 되는 셈이지요.”
4일과 9일에 열리는 신반 장날이 되면 종이를 팔러 가는 서암리 주민들의 행렬이 이어진다. 내다 팔 닥종이의 양이 많은 집에서는 우마차를 동원하기도 하지만, 그럴 형편이 못된 사람들은 지게에다 꾸려지고서 20리 길을 걸어 5일 장터로 몰려갔다. 물론 주민 모두가 장터로 나갔던 건 아니고, 지난 장에 내다 팔아서 만들어 놓은 종이가 얼마 안 된 사람들은, 다음 장에 나갈 요량을 하고서 종이 만드는 작업에 열중했다.
“새벽밥을 해 먹고 종이를 꾸려지고서 장터까지 걸어가자면 두 시간 넘겨 걸려요. 늦게 도착 하면 좋은 자리를 남들이 다 차지해버려서, 축축한 땅에다 종이를 쌓아둬야 하거든요. 그러니 지게 등짐을 하고서도 쉴 새가 없이 기를 쓰고 걸어야 했지요.”
드디어 장터에 도착했다.
-소매상들이 슬슬 모여들 때가 됐는데, 오늘 종이값이 우짤랑가 모르겠네.
-지난번에는 부산에서 온 지물포 주인한테 한목에 다 팔았다아이가.
닥종이도 오일장에 나온 다른 물품들과 마찬가지로 그때그때 시세가 달랐다. 손님이 왔다.
-어데 종이 좀 보입시더.
-보고 말고 할 끼 뭐 있십니꺼. 서암리 창호지 하면 최상품이지예.
-종이가 백옥같이 고와야제 우째 이리 누리끼리하노?
-하이고마, 닥나무껍데기가 원래 좀 노르스름한데 우에 백옥같이 하얀 종이가 나오노. 안 살라면 고만 두이소.
-다른 데 한번 돌아보고 나중에 올끼구마.
종이 고르는 데에 까다롭게 구는 이 사람은 지물포를 운영하는 사람이 아니고, 물건을 사서 되넘겨 파는 중매인이다. ‘한지생산자조합’이 결성돼 있지 않던 당시에는, 중도매인을 자처하면서, 지방에서 온 상인들과 생산자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러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다.
최지흠 할아버지가 젊었을 때인 1950년대 말에는 서암리에서 만든 한지가 황포돛배에 실려서 낙동강을 타고 멀리 부산이나 마산 등지로 팔려 나가기도 했다고 말한다.
그 당시에 종이 한 동을 판 돈으로 쌀 두 말을 살 수 있었다고 최 할아버지는 얘기한다. 한 동이면 무려 2천장인데, 여러 날 동안 그 복잡하고 힘든 과정을 거쳐 만든 2천장의 한지 값으로 쌀 두 말밖에 살 수 없었다니 놀라운 일이다. 하기야 창호지 값이 박하기도 했지만, 보릿고개가 엄존하던 시절이었으니, 쌀값이 비싼 탓이라고 이해하면 될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