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한지(韓紙)⑤ 땀과 눈물로 빚어낸 창호지 한 장

  • 입력 2023.09.10 18:00
  • 수정 2023.09.10 19:14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상락 소설가
이상락 소설가

떡을 치듯이 한바탕 매질을 해서 부드럽게 만든 닥나무의 속껍질 반죽을, 다시 한번 물에 씻어서 잿물을 완전히 제거한다. 마지막으로 커다란 나무통에다 넣고 물을 부은 다음, 알맞은 묽기의 점액으로 만든다. 닥나무의 섬유 원료를 물에 풀어서 담는 이 나무통을 지통(紙筩)이라고 부른다. 이제 이 점액에서 바로 종이를 떠내면 되느냐고 묻자 박해수씨는 빠져서는 안 될 또 한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닥풀 점액이란다. 닥풀?

“닥풀이라는 식물이 있어요. 밭에다 따로 재배를 하는데요, 그 뿌리를 물에 담갔다가 발로 자근자근 밟으면 코처럼 끈적한 점액이 나오는데, 이것을 지통에 넣고 잘 섞어 줘야 점성(粘性)이 높아져서 종이를 뜰 수가 있거든요.”

아욱과에 속하는 이 한해살이풀은 뿌리에 점액이 많아서 접착력을 배가시켜 주기 때문에, 한지를 만들 때 닥풀이 빠져서는 안 된다고 한다. 애당초 그 이름에 닥나무를 뜻하는 ‘닥’이 들어있는 것으로 보아, 예부터 이 식물이 닥종이 만드는 원료로 사용돼왔음을 알 수 있다. 지통에 닥풀 점액을 넣고 저어서 잘 섞으면 이제야말로 준비 완료다.

“자, 내가 이 지통에서 종이를 한 장씩 뜰 테니까 잘 보세요.”

박해수씨가, 대나무를 실처럼 가늘게 쪼개 엮어서 만든 발을 지통에 담그고는 일렁일렁 대다가 들어올리자, 물은 아래로 빠지고 창호지 한 장 두께만큼의 묽은 반죽이 대나무 발에 묻어난다. 예전에 어촌에서 김을 한 장씩 뜨는 것과 엇비슷한 방식이다.

이렇게 한 장씩 뜬 종이가 일정 분량 수북이 쌓이면, 위에다 돌을 눌러 물기를 뺀 다음 ‘철방’으로 옮겨진다. 철방(鐵房)이란 한지를 건조하는 방인데, 일인용 삼각 텐트처럼 양쪽으로 철판이 세워져 있고, 가운데서는 물이 끓고 있다. 바깥쪽 아궁이에서 불을 때면 물이 끓어서 증기가 발생하고 그 증기가 철판을 뜨겁게 만든다. 증기로 가열하지 않고 직접 불로 가열한다면 종이가 닿자마자 타버릴 것이다.

종이 뜨는 기술자들이 지통에서 종이를 떠서 포개 쌓아 놓으면, 물이 빠지기를 기다렸다가 다른 일꾼들이 각기 한 장씩 벗겨 들고 바로 옆 철방으로 가서, 증기로 달궈진 철판들에다 붙인다. 또 다른 일꾼들은 마른 종이를 철판에서 떼 내는 일을 하는데, 꽤 여러 명의 동네 부녀자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박해수씨의 작업장은 어느 정도의 규모를 갖춘 모름지기 ‘한지 공장’이기 때문에 꽤 여러 명의 일꾼들이 각각의 공정에 배치되어서 협업을 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부업 삼아 소규모로 종이를 뜨는 가정의 경우, 식구들이 총동원되어서 그 일을 했다고 한다. 박해수씨의 부인 임명순씨의 얘기를 들어보자.

“처음에 남편 될 사람이 무슨 공장을 운영한다고 해서 아, 먹고 살 걱정은 안 해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만 들어서 좋다고 시집을 왔는데…. 아이고, 오자마자 골병이 들 지경이었어요. 새벽 네 시에 일어나서 바깥에 있는 아궁이에 불을 지펴야 하거든요. 일꾼들 오기 전에 미리 불을 때서 저쪽 철방의 물을 끓여놔야 철판들이 가열될 것 아녜요. 지통에서 종이 뜨는 일도 미리 남편하고 둘이서 어느 정도는 해놔야 하는데, 옛날엔 고무장갑 그런 것도 없었잖아요. 새벽부터 찬물에 손을 담가서 종이를 한참 떠내고 나면 손이 얼음장이 돼버려요. 울기도 많이 울고…. 이제 제발 그만했으면 좋겠는데 이 일이 생업이 돼버렸으니 그럴 수도 없고….”

시집오던 날부터 지금껏 한지 만드는 일로부터 벗어나본 적이 없다는 임명순씨의 푸념이 한참이나 이어진다.

철판에 붙인 무른 종이가 마르면 제때제때 벗겨내야 하는데, 그 작업을 하는 일꾼들은 무엇보다 동작이 기민해야 한다. 철판에 붙이고 나면 불과 10여초 만에 종이가 마르기 때문에, 붙이는 사람보다는 벗겨내는 사람이 더 바쁠 수밖에 없다. 예전엔 어린아이들이 종이 벗기는 그 일을 맡아 하기도 했다.

어쨌든 이런 절차를 거쳐서, 산이나 들에 서 있는 닥나무의 껍질이 한 장의 창호지로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저작권자 © 한국농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