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한지(韓紙)④ ‘닥무지’ ‘피닥과 백닥’ 그리고 ‘닥메질’

  • 입력 2023.09.03 18:00
  • 수정 2023.09.03 19:36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상락 소설가
이상락 소설가

마을 사람들이 냇가 공터에 설치된 거대한 아궁이 위에다 자갈을 깔고서 한참을 달군 다음, 각자가 자기 밭에서 짊어지고 온 닥나무 다발들을 그 위에 올린다. 그러고는 빙 둘러서서 삽으로 흙을 퍼 넘겨 닥나무 다발을 덮는다. 불 때던 아궁이도 공기가 통하지 않도록 봉쇄한다.

그다음엔 자갈을 덮은 흙더미 여기저기에 구덩이를 피고는 거기다 물을 붓고, 그 구멍으로 김이 새지 못하도록 재빨리 흙으로 메워야 하는데, 그 작업은 순발력이 필요하다.

-자, 구덩이 팠으면 퍼뜩 물 부어라!

-뭐 하노! 물 부었으면 빨리 흙 떠서 구멍을 막으라카이! 그 옆 구멍에 김 다 샌다 아이가!

구덩이에 물을 부으면 흙 속의 달궈진 자갈 열기 때문에 김이 무섭게 솟아오르는데, 재빨리 흙을 퍼서 그 구덩이를 막아야 한다. 그런 다음에 옆에다 또 다른 구덩이를 파고 다시 물을 붓고 또 막고…. 그렇게 하면 흙더미 속에 갇힌 뜨거운 증기가 닥나무를 익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 작업은 순전히 닥나무의 껍질을 쉽게 벗겨내기 위한 과정이다. 닥나무를 파묻어서 익히는 이 시설을 ‘닥무지’라고 부른다.

증기를 쐐서 익힌 닥나무 가지에서 껍질을 벗겨내는 작업은 비교적 수월하지만, 그것은 지극히 기초적인 작업에 불과하다. 벗긴 닥나무 껍질은 개울가 자갈밭에 내어다 말린다. 다 마르면 집으로 가져와서, 열두 시간가량을 물에 담가서 불려야 한다.

-에미야, 아침 밥상 치웠으면 퍼뜩 나와서 칼질 안 하고 뭐 하노?

이른 아침부터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칼질 작업을 서두르라고 성화다. 나무에서 벗겨낸, 다시 말해서 검은 표피가 그대로 붙어 있는 닥나무 껍질을 ‘피닥’이라고 부른다. 종이 만드는 데에 쓰이는 재료는 하얀 속껍질이기 때문에, 칼을 가지고 일일이 겉껍질을 벗겨내야만 한다. 즉, 피닥을 ‘백닥’으로 만드는 작업인데 그 일은 주로 여자들의 몫이었다.

-아이고, 손시럽워라. 어무이요, 나무껍질 벗기는 칼질 이거 춥워서 몬 하겠심니더.

-내는 열여섯에 시집와서 평생을 해온 일인 기라. 춥다고 안 하면 식구들 굶겨 쥑일끼가?

겨울철에 새벽부터 일어나 언 손을 물에 적셔 가며 닥나무 껍질을 벗겨야 했던 그 마을에서의 시집살이는, ‘고초·당초보다 더 맵다’던 농촌의 그것과는 또 다른 매운맛이었다.

여자들이 칼질로 겉껍질을 벗겨내고 얻은 하얀 닥껍질, 즉 ‘백닥’은 양잿물의 일종인 소다회를 넣고 가마솥에서 세 시간 가량을 삶아야 한다.

“닥 삶는 게 아주 어렵습니다. 잿물을 넣고서 불을 때서 닥(백닥)을 삶거든요. 고루 삶아지도록 이리저리 저어줘야 하는데, 요놈이 끓기 시작하면요, 물이 탁탁 튀어 오릅니다. 워낙 뜨겁기도 한 데다 소다회라는 양잿물 성분 때문인지, 옷 위로 물이 튀었는데도 나중에 벗어보면 살갗이 벌겋게 부어올라요. 어이구, 나도 여러 번 뎄어요. 지금도 흉터가 있는걸요.”

이제 그다음의 일은 남자들의 몫이다.

-해수야, 그만 자고 빨리 나와서 닥메질 좀 하그라.

아직 어둠이 거뭇거뭇 자리보전을 하고 있는 새벽인데 할아버지의 성화가 추상같다. 여남은 살의 어린 박해수가 눈을 반쯤 감은 채로 비칠거리며 토방으로 내려선다. 국민학교 다니는 어린아이라고 해서, 식구들의 생계가 달린 노역에서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닥메질이 뭐냐 하면, 가마솥에서 꺼낸 닥껍질 반죽을 평평한 돌 위에다 얹어 놓고서, 마치 떡을 치듯이 나무 메로 치대는 겁니다. 닥(나무)의 성질을 죽여서 부드럽게 하는 작업이지요. 어린 나이에 밥도 배불리 못 먹어서 기운은 없는데 그놈의 메질을 한바탕하고 나면….”박해수 씨는, 허기진 몸을 비틀거리며 이른 아침부터 메질을 해야 했던 어린 시절을 돌이키다가 이내 목이 잠긴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그 산골 마을에서, 새벽부터 뉘 집 할 것 없이 모두 일어나 닥껍질 반죽에다 메질을 해댔으니, 그 소리가 이 골짝 저 언덕에 울려 퍼지고 다시 메아리로 돌아오고 하는 바람에, 온 동네가 쿵딱쿵딱, 들썩들썩, 요란했다고 박씨는 회고한다.

저작권자 © 한국농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