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한지(韓紙)③ 들어보셨나요? ‘닥 농사’

  • 입력 2023.08.27 18:00
  • 수정 2023.08.27 20:53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상락 소설가
이상락 소설가

1940년대 중반, 의령군 봉수면 수암리 중턱에서 나뭇짐을 지고 내려오던 두 남자가 만났다. 작대기로 지게를 받쳐 세운 두 사람이 땀을 닦고는 숨을 고른다,

-내는 한 다발밖에 몬했는데, 박가 니는 어데서 그렇게 많이 했노?

-아이고마, 나무 요놈 할라꼬 저 국사봉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아이가.

-인자 마, 사람들이 이 언덕 저 골짜기 천지 사방 들쑤시고 댕기면서 다 훑어 삤으이, 이러다가는 아예 닥나무 씨가 마르겠다 아이가.

해방 직후만 해도 이 마을 사람들은 이 산 저 산 돌아다니며 야생 닥나무를 해다가, 아주 소규모로 종이를 떠서는 5일장에 내다 팔았다. 그 만만해도, 다른 산골 사람들이 땔나무를 한 짐씩 해서 장마당에 내다 팔아 생계를 유지한 데에 비하면, 벌이가 훨씬 좋았다.

종이를 만들어 파는 것이 농사짓는 것보다는 한결 낫다는 판단이 서자, 사람들은 본격적으로 닥나무를 재배하기에 이르렀다. 박해수씨의 설명을 들어보자.

“종이 시세가 원체 좋으니까, 곡식 파종하던 밭에다 너도나도 ‘닥’을 키우기 시작한 거요. 동짓달 무렵에 굵기가 오륙 센티미터가량 되는 뿌리를 잘라다가, 겨울 동안 움막 속에 모래를 깔고 거기다 저장을 해요. 그랬다가 이듬해 3월 중순쯤에 밭에 내다 심는 거지요.”

닥나무는 성장 속도가 뽕나무와 비슷해서, 파종한 지 2년째부터는 수확을 할 수 있었다. 닥나무를 수확할 시기가 되면 어린 국민학생도 일손을 보태야 했다.

-해수야! 학교 댕게 왔으면 퍼뜩 닥나무 찌러 밭으로 나올 일이제 뭐하고 있노!

-숙제해야 되는데 맨날 일만 하라고 그래….

-숙제 그까짓 거 한다꼬 밥이 나오나 떡이 나오나. 낫 들고 와서 퍼뜩 닥나무 찌라카이!

그 시절 농촌의 아이들이 들판으로 불려 나가 농사일을 거들어야 했던 것처럼, 서암리의 아이들은 낫을 들고 밭에 나가서 닥나무 가지 찌는 일을 도와야 했다.

-부지런히 종이 떠서 이번 장에 내다 팔면, 니 고리땡 바지 하나 사다 줄끼구마.

‘고리땡 바지’ 사준다는 말에 아이의 입이 헤벌어진다. 그렇게 온 가족이 닥나무밭으로 나가서 나무줄기를 찐 다음에는, 한 아름씩 다발로 묶어서 지게에 지고 개울가로 나간다. 개울가 공터에는 한지 만들기의 1차 공정을 수행할 마을 공동 작업장이 있었다.

“개울가에 땅을 파서 거대한 아궁이를 설치하고는 밑에서 불을 때요. 그리고 사람들이 빙 둘러서서 그 불길 위에다 삽으로 자갈을 퍼 얹거든요. 아래쪽 아궁이에서 자꾸 불을 때니까 그 위에 얹은 자갈 무더기가 서서히 뜨거워질 것 아니겠어요. ‘불 당번’을 정해서 몇몇은 불을 계속 피우고, 나머지는 자기 밭에 가서 농사지은 닥나무 다발을 연신 져 나르지요.”

자갈이 어느 정도 가열됐다 싶으면 이제 닥나무 다발들을 달궈진 자갈 위에 차곡차곡 올린다. 아무렇게나 얹어놓는 것 같아도, 어느 것이 자기네 나무 다발인지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닥나무를 적게 벤 사람은 두세 다발, 많이 벤 사람은 열 다발까지도 짊어져다 얹는다.

-자, 이제 가마니하고 거적뙈기 가져다 나뭇단 위에 덮자구!

-다 덮었으면 전부 삽 들고 흙 작업 시작하자!

그러니까 불에 달궈진 자갈 위에 닥나무 다발을 올리고, 나무 다발 위에다 거적뙈기나 가마니를 덮은 다음에, 그 위에 다시 흙을 덮는 작업이다. 아프리카 오지의 원주민들이 산짐승을 훈제로 익히는 것과 비슷한 방법으로 닥나무를 익히는 것이다. 물론 이때는 불 때던 아궁이도 모두 흙으로 덮어 막아버린다.

-자, 인자 멫멫은 흙구덩이 파고, 나머지는 그릇들 챙겨 들고 일렬로 서보라카이!

사람들이 물동이나 양은그릇을 들고 일렬로 늘어선 채로 냇물을 떠서 전달한다. 그 사이에 삽을 든 사람들은 흙더미에 구덩이를 판다. 전달된 냇물을 그 구덩이에 붓는다. 김이 무섭게 솟아오른다. 그러면 재빨리 흙을 떠서 구멍을 덮는다. 다른 곳에 또 구멍을 파고 물을 붓고….

저작권자 © 한국농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