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재해대책 똑바로 세우시라, 쇠뿔을 단김에 빼듯이

  • 입력 2023.08.27 18:00
  • 수정 2023.08.27 20:54
  • 기자명 구점숙(경남 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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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점숙(경남 남해)
구점숙(경남 남해)

우리 마을에 산 지 꼭 15년째입니다. 하늘빛과 산그늘은 그대로인데, 속살은 참 많이 바뀌었습니다. 품앗이로 심던 마늘은 양도 많이 줄었고, 품앗이 문화도 거의 없어졌습니다. 빈 밭의 풀도 못 봐주던 그 부지런함은 어데로 가고, 예사로 밭고랑에 풀이 자랍니다. 당연하게도 그 무서운 풀을 감당할 몸이 따라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루 일하면 이틀은 병원에 다녀와야 하는 처지다보니 풀보다 몸을 챙길 수밖에 없게 된 것이지요.

무엇보다 더워도 너무 더운 여름날씨에 농사일을 할 수가 없다보니, 노동의 평준화가 이뤄진 것입니다. 농민 모두 부지런 종교 단체 회원인 양 너무도 열심히 일하는 그 일머리, 일손이 잠시 멈춤입니다. 급한 성질, 많은 농사와 상관없이 여름농사에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인근 시군까지 폭염문자를 보내오고, 마을 방송은 하루에도 몇 번씩 논밭에 나가지 말라고 하고, 자식들도 일하지 말라고 전화를 해대니 누가 감히 죽음도 불사하고 논밭으로 나갈 수가 있겠습니까? 아니 그런 문자 안 보내더라도 도대체가 더워서 논밭에 갈 수가 없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기후재난 상황입니다.

벼 대신 논콩을 심으라는 유인정책에 호응했는데 논이 잠겨 낭패를 봤다는 전북의 한 농가, 생산비를 줄이려고 여름 하우스에 작물을 넣었다가 물에 잠긴 충남의 농가, 한 달 내리 폭우가 내린 탓에 탄저병이 든 사과를 조기 출하할 수밖에 없는 과수농가 등 기후재난 피해 얘기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대부분 수해를 입은 지역은, 수해가 예견된다고 대비를 요구한 곳들이 많습니다. 그러니 답답한 노릇이지요. 농사는 곧 삶입니다. 한철 농사가 망쳐졌다고 삶이 무너지겠냐 하지만, 요즈음의 농사는 생산비가 너무 많이 드는 까닭에 한철 농사가 잘못되면 삶의 질이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규모 있는 농가일수록, 젊은 농가일수록. 더군다나 기후재난 상황은 한철 농사의 문제가 아니라 이제 일상적인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쯤 되면 당연히 상황에 따른 재해대책이 나올 법합니다. 이제껏은 잠긴 들판이 TV 뉴스에 비칠 때나 ‘적극’적인 대처를 하겠다고 하고, 이내 농약값이나 자재값 일부만 지원하고들 해왔습니다. 하지만 올해는 기후재난이 눈에 띄게 심각해지니 여러 국회의원들이 현장의 의견을 반영하여 ‘생산비’를 반영한 대책으로 농업재해대책법 개정안을 제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재정상황과 기존지원 중복 운운하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생산비를 보장하는 대책은 재난안전기본법의 복구비와 형평성이 안 맞다고 우려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법 개정으로 항구적인 대책을 세우는 대신 일시적인 방편으로 대파비를 배로 인상하고, 폐사된 가축 입식비를 지원하고, 논콩 등 전략작물에 대해서 직불금을 지원하겠다고 합니다. 소극적인 대책 중에서도 가장 소극적인 대책입니다. 이렇게 해서는 기후재난이 일상이 된 현재의 상황을 극복하며 농업생산을 이어갈 수가 없습니다. 농민들이 농사와 삶에 대한 걱정과 재해에 대한 두려움으로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가 어렵습니다.

사실 농업부문에서 형평성을 논한다면, 2박3일 넘게 따지고 싶은 얘기들이 많습니다. 가격 결정 구조가 농민에게 불리하게 작동하고, 그렇게도 강조하는 시장의 자율성도 농민들에게서만은 예외지요. 수확기에 난데없이 저율관세로 수입을 해서 가격을 폭락시키는 마늘, 양파, 고추는 국가가 의도적으로 가격을 조정하는 것 아닌가요? 각종 개발의 이름으로 농촌의 생산기반은 끝없이 침해받고 있는데, 다른 것은 눈감고 재난 대책에서만 형평성을 논한다는 게 참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생산비가 반영된 재해대책을 세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누가 봐도 이견을 달 수 없으리만치 기후재난이 심각해져 농사기반이 무너지고, 농업생산이 염려될 때, 미친 척하고 힘을 모아서 법제도를 개정할 지혜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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