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칼럼] 토종 씨앗, 음식을 넘어 보약이다

  • 입력 2023.08.27 18:00
  • 수정 2023.08.27 20:54
  • 기자명 김현지(전남 곡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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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지(전남 곡성)
김현지(전남 곡성)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르듯 도시에서 40년을 산 나는 어렸을 때 경주에서 밀농사를 짓는 할아버지를 보았지만, 농사를 짓기 전까지 농사의 農자도 몰랐다. 귀농 첫해 고추를 심고 콩도 심었는데 고추는 모종을 사다 심고, 콩은 옆집 할머니에게서 메주콩을 얻어서 심었다. ‘하늘이 농사짓다 도망갈까 봐 첫해 농사는 잘되게 한다’는 말처럼 어설프게 농사를 지었지만, 농사가 아주 잘 되었다.

특히 콩 농사가 잘 돼 당시 지인이 운영하는 평택 생협에 메주콩을 보내게 되었는데, 맛을 보더니 감칠맛이 없다고 토종콩들을 몇 가지 보내주었다. ‘콩에 무슨 감칠맛이람. 조미료도 아니고….’ 처음 보는 콩들을 보며 든 생각이었다. 서리태, 쥐눈이콩, 메주콩밖에 몰랐던 내게 아주까리 밤콩, 아주까리 까만콩, 밤콩, 푸르대 등의 콩들은 토종 씨앗과의 첫 만남이 되었다.

그로부터 16년이 흘렀다. 지금은 겨울이나 봄에 심는 3가지 완두콩(푸른 완두, 붉은 완두, 크기가 작은 애콩)과 더불어 봄에 심는 다양한 색의 두벌 동부콩 5가지, 넝쿨 동부콩 8가지, 초여름에 심는 장콩 5가지, 밥밑콩 10가지, 콩나물콩 3가지 등 30가지가 넘는 콩을 심고 있다. 그렇게 콩들을 심으면서 하나하나가 가진 고운 색을 보는 즐거움과 함께, 드디어 감칠맛이란 게 어떤 것을 말하는지 온몸으로 알게 되었다.

처음 농사를 지을 때부터 무비닐, 무농약, 무비료, 무제초제로 농사를 지었는데, 재작년부터 무경운으로 밭농사를 지으면서 평이랑으로 짓던 콩을 10cm 정도의 두둑을 주어 심었다. 수확량이 늘어났고 무엇보다 올해같이 긴 장마에도 끄떡없이 잘 견뎌 주었다. 밭을 매며 벌레들을 잡고 땅과 소통하며 키운 이 콩들로 콩국수를 해 먹으면 설탕을 넣지 않아도 설탕을 넣었느냐고 물어볼 정도로 달고, 메주를 쑤어도 감칠맛이 훨씬 강한 된장이 된다.

콩뿐만 아니다. 전라도에서 ‘퐅’이라고 부르는 팥은 붉은팥만 알았는데, 토종 씨앗을 알고 나서 10가지나 되는 팥을 심고 있다. 붉은팥 종류만도 세 가지가 되고, 흰팥 두 가지, 검정팥, 잿팥, 갈가마귀팥, 이팥, 자주팥, 똘팥 등이 있다.

다양한 색의 팥을 보는 즐거움은 농사짓는 힘겨움을 잊게 한다. 팥을 먹었을 때 생목이 올라와 팥을 드시지 않는 분들이 계신데, 다섯 가지 이상의 팥으로 죽을 끓이니 그런 증상들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작물이 가진 독성이 섞어 삶으며 중화된 것이다. 그야말로 음식이 아니라 약인 것이다. 신기하게도 다양한 색의 팥을 삶으면 조금 옅은 팥의 색이 그대로 나온다. 팥이나 콩을 판매할 때 층층이 다양한 색은 보는 이들마다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데, 몸에는 한 가지만 먹었을 때보다 훨씬 더 좋다는 것을 잘 알리고 싶다.

그뿐인가, 녹두는 코로나 시국에 좋은 치료제가 되었다. 코로나19에 걸린 어르신들께 푸른 녹두와 노란 녹두, 똘 녹두를 넣은 죽을 끓여드렸더니 한결 몸이 가벼워지고 입맛이 돈다고 좋아하셨다. 몸의 독을 제거하는 성분이 강한 녹두는 익을 때마다 따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구수한 맛과 약성으로 힘이 들지만 해마다 꼭 심고 있다. 고생고생해서 딴 녹두는 절대 팔지 않는다. 적당한 가격을 받기도 힘들지만,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싶어서다.

문명의 이기와 인간의 욕심으로 생물의 다양성이 점점 줄어들어 예전에 99:1이었던 생태계는 1:99로 인간이 온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지구 환경을 지키는 것과 더불어 더 늦기 전에 생물 다양성을 늘리는 농사를 짓는 것이 농부의 책무가 아닐까 한다.

토종콩, 팥, 녹두, 고추, 오이, 참외, 가지, 수박, 호박, 흰참깨, 검은참깨, 흰들깨, 검은들깨, 마늘 등은 음식을 넘어 병을 고치고 몸을 건강하게 하는 약이다. 그것을 온몸으로 느끼는 나는 행복한 농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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