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한지(韓紙)② 창호지 탄생의 전설

  • 입력 2023.08.20 18:00
  • 수정 2023.08.20 18:23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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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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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의령군 봉수면 서암리에서 3대째 한지 만드는 일을 해오고 있다는 박해수씨(1943년생)는, 취재차 마을을 찾아간 나와 마주 앉자마자 대뜸 “197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 마을주민 500여 세대 중에서 400세대가 넘게 닥을 가지고 먹고 살았어요”라고 했다. 얼핏 들으면 주민 대부분이 양계업에 종사했다는 것으로 오인할 만한데, 박해수씨가 말하는 ‘닥’은 ‘닭’이 아니라 뽕나뭇과에 속하는 키 작은 활엽교목 즉 ‘닥나무’를 일컫는다. 예부터 이 닥나무 껍질이 문종이(한지)의 기본 원료로 사용돼왔다. 달리 말하면 닥나무 껍질로 한지 만드는 일을 생업으로 삼아왔다는 얘기가 된다.

그렇다면 산자락으로 둘러싸여서 별 특징이 없어 보이는 이 산간 마을이 어떻게 해서 우리나라 전통 한지의 주요 생산지가 되었을까?

“…그러이깨네 시님이 절 지아놓고 여름에 인자 냇가에 가보이 좋은 물은 흘러가고 고티이(고인) 물은 이끼가 생길 거 아이가? 그 이끼를 그릇에 담아 절에 와가 일렁일렁 해보이….”

서암리가 ‘한지 마을’이 된 연원을 최지흠 할아버지(1928년생)가 설명하는데, 사투리가 원체 심해서 내가 알아듣지 못하고 쩔쩔매자 한지 공장 주인장 박해수씨가 ‘통역’을 해준다. 그 내용을 꿰맞춰 구성하면 이런 이야기가 된다.

고려시대에 설(薛)씨 성을 가진 스님이 의령군 봉수면 서암리 마을 뒤편에 솟아 있는 국사봉 중턱에다 대동사라는 절을 지어놓고 그 절의 주지 스님이 되었다. 어느 날 사찰 인근 골짜기로 수도승을 데리고 간 주지 스님은, 웅덩이의 물을 막대기로 휘휘 저어 보이며 말한다.

-신기하지 않아? 오래전부터 이 웅덩이에 닥나무 가지 몇 개가 잠겨 있었던 모양인데….

-그런데 스님, 무엇이 신기하다는 말씀입니까?

-닥나무 껍질이 흐물흐물 풀려서 마치 풀 쒀 놓은 것처럼 텁텁하게 됐지 않은가 말이야.

-야, 정말 그렇네요.

-더 신기한 것을 보여 주지. 자네 서 있는 그 뒤쪽 바위를 보게. 내가 어제 닥나무 껍질이 풀어진 이 웅덩이 물을 고무신짝으로 떠다가 바위에 부어놓았는데….

-어, 이거 정말 종이가 돼버렸네요. 와, 여기다 반야심경을 써도 되겠습니다, 주지 스님.

-으음, 잘하면 닥나무 요놈이 굶주린 중생들을 구휼할 양식이 돼줄지도 모르겠구먼. 자네 저 닥나무 껍질을 벗겨서 절집으로 가져가서 물동이에다 한 이틀 담가두어 보게나.

드디어 닥나무 껍질이 물에 불어나면서 섬유질이 생기는 것을 발견한 대동사의 주지 스님이, 종이 뜨는 법을 개발해서 서암리 주민들에게 전파했다는 것이다. 닥나무가 제지원료로 쓰인 때가 고려시대 이후였다는 기록이 문헌에 나와 있는 것으로 봐서, 근거 없는 얘기만은 아닐 성싶다. 더군다나 다른 지역에 비해서 야생 닥나무가 그다지 많지 않은 이 지역이 한지 생산의 중심지가 되었던 것은, 아무래도 닥나무를 이용한 한지 제조를 가장 먼저 시작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서암리가 소속된 봉수면의 연혁을 살펴보아도 1316년 고려 충숙왕 3년에는 ‘봉산면’이 되었다가, 그로부터 3년 뒤에는 한지의 원산지라 하여 ‘지촌면(紙村面)’으로 바꿔 불렀고, 이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봉수면’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어쨌든 산에서 자라는 닥나무의 껍질을 벗겨서 만든 종이가 바로 우리나라의 전통 한지인데, 그 종이를 주로 문 바르는 데에 사용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보통 창호지라고 불렀다.

해방 직후만 해도 서암리 사람들은 이 산 저 산을 돌아다니며 야생 닥나무를 해다가 아주 소규모로 종이를 떴다. 하지만 다른 산골 마을 사람들이 땔나무를 한 짐씩 해서 5일 장에 내다 팔아 근근이 생계를 유지했던 데 비해서, 이 마을 사람들은 닥나무를 가공해서 종이를 만들어 팔았으니 상대적으로 생활 형편이 훨씬 좋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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