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일장을 맛보다㉙] 강냉이죽을 추억하는 홍천의 오일장

  • 입력 2023.08.20 18:00
  • 수정 2023.08.20 18:33
  • 기자명 고은정 제철음식학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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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설 홍천중앙시장 전경.
상설 홍천중앙시장 전경.

 

 

고은정 제철음식학교 대표
고은정 제철음식학교 대표

홍천은 어머니의 고향이다. 뿌리를 찾는 사람처럼 한동안은 홍천으로 이사를 갈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을 만큼 내가 좋아하는 곳이다. 그러니 홍천에서 뭔가 일을 하자고 하면 앞뒤를 가리지 않고 달려가는 사람이 되었다. 휴게소에 들르지 않아도 5시간은 운전하고 가야 하는 곳인데 일년내내 수업을 하러 간 적도 있고, 어떤 마을들과는 뭔가 협업을 하러 뻔질나게 들락거렸다. 그런 홍천으로 오일장을 보러 가는 내 발걸음이 가벼운 건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설렘 때문이었다. 다른 장에 가던 날보다 일찍 출발해서 홍천의 장에 도착했을 때는 장터가 휑하니 비어있었다. 오일장을 위한 주차장이 별도로 있지 않아 근처 읍사무소 지하에 주차를 했다. 동료들을 만나기 전에 혼자 느린 발걸음으로 장이 서게 될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차에서 물건을 내리는 분들도 계시고 옥수수를 까서 삶아낼 준비를 하고 계셨다. 화장실이 어디 있는지도 봐둔다. 다시 한 바퀴를 돌게 되겠지만 지금 이 모든 순간을 다 눈에 담아두고 싶은 심정이었다.

 

 

'찰옥수수 전문' 천호식품 종업원들이 불볕 더위 속에 옥수수를 손질하고 있다.
'찰옥수수 전문' 천호식품 종업원들이 불볕 더위 속에 옥수수를 손질하고 있다.

 

 

시간이 흐르고 장이 모양새를 갖추기 시작할 무렵 같이 다닐 동료들이 왔고, 우리는 40년을 한 자리에서 장사하고 있는 선지해장국집에 들러 아침을 먹었다. 날이 더 뜨거워지기 전에 장을 보기로 했고, 마음 단단히 먹고 시작했지만 몇 걸음 떼지도 않았는데 지치고 있었다. 체감온도 40도쯤은 될 것 같은 8월의 첫 일요일은 오일장이 열리는 것도 오일장을 돌아보는 것도 모두 무리인 것 같은 날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얼굴을 타고 흐르는 날에 불 앞에서 삶은 옥수수를 건져내고 계신 분들을 보니 힘들다는 소리가 절로 목으로 기어들어가 버렸다.

난전에 앉아 계신 어르신들과 눈이 마주치기 민망한 날이다. 아침에 따가지고 나오셨을 호박, 가지, 오이, 호박순, 고구마줄기 등등이 용광로 같은 8월의 햇살 아래서 시들고 물러질까 노심초사 하시는 모습을 보는 고통이 힘들어 내가 다 사가고 싶다. 이제 다 파셨으니 얼른 들어가시라고 말하고 싶다. 사가지고 간들 바로 조리할 수 없으니 내 차 안에서 썩고 말라비틀어질 게 뻔해 극도로 조심하고 자제를 하자니 마음이 영 편치 않다. 거리의 오일장은 뜨거운 기온과 반비례해 행동이 느려지고 기운이 빠지는 느낌이라 무겁다. 꼬부라진 오이 한 무더기를 사고 자리를 옮긴다.

 

 

난전을 차린 어르신들이 무더위와의 싸움 속에 호박, 가지, 오이 등을 팔고 있다.
난전을 차린 어르신들이 무더위와의 싸움 속에 호박, 가지, 오이 등을 팔고 있다.

 

 

홍천의 오일장은 홍천중앙시장을 둘러싸고 열린다. 오일장이 열리는 날엔 중앙시장이란 이름의 상설시장도 자연스레 오일장이 되는 셈이다. 상설시장 안은 여느 장터와 달리 홍천의 대표적인 먹거리를 만들어 파는 가게들의 집합체 같은 느낌이 든다. 춘천이나 정선, 아니 강원도의 그 어느 곳에서든 흔하게 만날 수 있는 메밀부침과 메밀총떡을 ‘홍총떡’이란 브랜드로 만든 곳이 홍천이다. 게다가 옥수수 축제를 할 만큼 옥수수가 흔한 곳답게 올챙이국수를 만들어 판다. 옥수수죽을 쑤어 구멍 뚫린 바가지를 통해 찬물에 내리면, 찰기가 부족한 죽이 뚝뚝 끊기며 떨어져 마치 올챙이처럼 물속에서 흔들리는 모양에서 유래한 이름이 올챙이국수다.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가래떡처럼 기계로 내리니 긴 국수 가락의 올챙이국수를 만날 수 있을 뿐이다.

메밀은 껍질을 벗기고 밝고 고운 색의 가루로 부침을 하고 총떡을 만들지만 이 과정에서 나오는 지게미 같은 껍질을 얻어다 밀가루를 섞어 부침을 만들어 먹기도 한다. 메밀향은 껍질에서 많이 나오니 이걸 더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다. 가끔 홍천에서 하는 결혼식에 가게 되면 남도의 홍어무침 정도로 잔치음식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메밀부침이다. 하객이 많으면 몇천 장을 부쳐서 가는 손님의 손에 들려 보내기도 한다.

 

 

 

 

홍천장에선 메밀부침, 메밀총떡, 올챙이국수 등 지역 농업을 기반으로 한 강원도 고유의 먹거리를 즐길 수 있다. 
홍천장에선 메밀부침, 메밀총떡, 올챙이국수 등 지역 농업을 기반으로 한 강원도 고유의 먹거리를 즐길 수 있다. 

 

 

올챙이묵은 열무김치와 매운 고추를 다져 넣은 간장으로 먹는데 색만 있고 맛은 없는 올챙이국수에 매운 양념장과 김치가 묘하게 어울려 중독성을 보이는 음식이다. 찰기 없는 옥수수로 직접 만들어 먹던 시절의 구수함은 사라진 지 오래다. 수입종 옥수수를 심어 노란색이 예쁘기는 하지만 구수함이 사라진 탓이다. 어머니의 고향이 철정이라 말하니 상인께서 옛날 올챙이국수맛을 기대하면 안 된다고 미안해 하신다. 그런 솔직함이 괜히 고맙다.

가마솥에 옥수수죽을 쑤면 늘 얻어먹던, 막 긁어내 말리던 손바닥만한 옥수수죽누룽지를 얻어들고는 어린아이처럼 좋아라 하며, 고향 같은 홍천의 오일장을 벗어나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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