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예민한 사람도 농촌에 살고 싶다

  • 입력 2023.08.20 18:00
  • 수정 2023.08.20 18:23
  • 기자명 신수미(강원 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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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수미(강원 원주)
신수미(강원 원주)

작년 가을, 농업경영체등록을 하고자 임대차계약서를 쓸 수 있는 땅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다, 어렵게 지금 농사짓는 곳을 얻게 되었다. 새로 얻은 밭은 도로 옆에 있긴 하지만 양 옆으로 나무가 심겨 있는 길을 따라 들어간 외진 곳이다. 작년까지 농사짓던 땅은 면 거리 한가운데 있었다. 덕분에 동네 어르신들의 온갖 관심을 한몸에 받고, 잔소리도 그만큼 들었지만 혼자 일해도 긴장되거나 무섭지는 않았다. 오히려 하루에 몇 번씩 지나가시면서 말을 건네시는 어르신들을 피해 길에서 먼 고랑에서 일을 하기도 했었다.

그런 상황에 익숙해져서인지 새로 얻은 밭에서 혼자 일을 할 때면 왠지 모르게 긴장하게 된다. 주변에 밭주인 사는 집 말고는 인적도 없고, 사람이 걸어 다닐 만한 도로가 아니라서 차 지나가는 소리 외에 다른 인기척이 들리면 화들짝 놀라곤 한다. 날이 밝아지는 새벽에 일할 때는 덜 그렇지만 날이 어두워지는 오후에 일할 때는 맘이 더 급해지기도 한다. 시골 동네에서 뭘 그렇게 예민하게 구느냐고 한다면 나도 이렇다 할 이유를 대기는 어렵다. 그냥 혼자 외진 곳에서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긴장이 된다. 지금까지 여성으로 혼자 살아오면서 몸에 배인 본능이나 습관 같은 것 아닐까 생각한다. 예초기 소리가 없다면 사람이 있는지도 모를 밭에서 혼자 긴장해서 무슨 소리가 나면 미어캣 마냥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피는 내 모습이 스스로도 마땅치 않지만, 그런 이유로 밭에 가는 걸음이 예전만큼 가볍지는 않다.

또 한 가지 불편한 것이 있는데, 그건 화장실이다. 차로 5분 거리에 공용으로 쓸 수 있는 화장실이 몇 군데 있던 곳에서 공용화장실에 가려면 면 거리 농협까지 나가야 하는 곳으로 오니 더 불편한 듯 느껴진다. 길 건너 밭주인 집이 있지만 화장실 쓰겠다고 들어가자면 더 불편한 일이 될 것이 뻔해 아예 엄두도 내지 않는다. 도시에서는 길거리에 개방화장실도 많고, 정 안되면 건물에 들어가면 웬만하면 해결이 될 일들인데 농촌마을에서는 쉽지 않다. 결국 답은 노상에 익숙해지는 방법밖에 없어 보이는데, 밭에서 긴장하면서 일하는 나는 그것도 내키는 방법은 아니다. 돌이켜보면 학생 시절 농활 가서 일할 땐 그냥 아무생각 없이 노상에서 해결했었는데, 왜 지금은 이게 불편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그건 아마도 잠시 견디면 벗어날 불편을 대할 때와 지속해서 일하고 살아야 하는 입장의 차이가 아닐까 싶다.

언젠가 선거를 앞두고 여성이 살고 싶은 농촌이라는 주제로 정책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여성농민이 얘기했던 이동식 화장실 설치가 나에게도 필요한 정책이 되었다. 그렇지만 농민회 선배님들이나 현장에서 만나는 분들과는 이런 얘기를 하지 않는다. 왠지 내가 약하고 예민한 사람이라고 인정하는 것 같고, 대책 없는 불평을 늘어놓으며 투정부리는 것같이 느껴질 것 같아서다. 주로 혼자 일하는 또래 여성들에게 이런 긴장감과 불편함을 넋두리처럼 얘기한 적 있는데 ‘그럴 수 있지’ 라며 공감을 해줘서 고마웠다. ‘여성이 살고 싶은 농촌’은 이런 불편함에 공감해 주는 것이 시작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런 상황과 감정은 농촌에 있는 대다수가 느끼거나 보편적으로 불편한 사항은 아닐 수 있다.

그래서 어쩌자는 거냐. 대책을 물으면 ‘이동식 화장실 설치’ 말고는 나도 딱히 얘기할 수 있는 해결책도 없다. 하지만 농촌에서의 삶을 선택한 여성들 중에는 나처럼 혼자 일하면서 왠지 모를 긴장감을 겪고, 화장실을 찾아 헤매고, 도시와는 다른 정서에 멈칫하고, 나아가 농촌은 좋지만 사는 것은 엄두가 나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당신이 너무 예민해서라던가, 그러니 좋은 신랑감을 찾으라 하는 대답 말고, 공감하고 한 번쯤은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좋겠다. 사회가 좋은 방향으로 발전하는 것은 어느 한순간 어떤 계기로 확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속의 구성원들의 생각과 관계가 변하면서 한 단계 나아가는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우리가 서로 다른 입장과 어려움에 귀 기울이고 공감하면서 우리 주변 관계부터 변화될 때 내가 사는 곳도 ‘여성이 살고 싶은 농촌’으로 좀 더 가까워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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