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제초제가 필요한 이유

  • 입력 2023.08.13 18:00
  • 수정 2023.08.13 21:59
  • 기자명 정성숙(전남 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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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숙(전남 진도)
정성숙(전남 진도)

요즘은, 어둑한 5시에 집을 나서 5시 20분쯤이면 주변이 밝아지면서 밭일을 시작할 수 있다. 햇살이 아직 비치지 않았고 일도 시작 전인데 땀샘은 언제 열렸는지 온몸에서 물기를 밀어낸다. 빗물처럼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가꿀 수 있는 참깨가 장마를 견디고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거듭 감사한다. 참깨 꼬투리가 굵어지며 여물이 들고 있는데 끄트머리에서는 계속 꽃이 피고 있다. 조만간 참깨를 벨 예정이라 더 이상의 생식 성장은 체력 낭비다. 꽃이 피는 끄트머리를 잘라주면 윗부분의 씨알까지 실하게 여문다.

누워서 껌 씹는 정도의 가벼운 일감으로 생각하고 손으로 참깨 끄트머리를 따기 시작했다. 손으로 잡아당기다 보니 간혹 가지가 부러져서 가위로 잘라 봤다. 가위로 자르니 맨손으로 하는 것보다 일의 속도가 더 빨랐다. 예상보다 빠르게 일감을 줄일 수 있겠다 싶었다. 가위질을 시작한 지 30분쯤 지나자 엄지손가락이 아파서 더 이상 가위질을 할 수 없었다. 손가락을 끼우지 않아도 되는 전정가위로 바꿔 자르니 제법 수월했다. 10시가 넘자 땡볕을 마주하는 것 자체가 버거워졌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에 매달려 헛심을 쓰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지면서 해찰 부릴 핑계를 찾고 있을 때, 붉은색 바구니를 엎어놓은 것처럼 울울창창하게 퍼져있는 쇠비름이 보였다. 한 달 전쯤에 간혹 나 있던 쇠비름을 뽑아서 참깨 두둑의 비닐 위에 올려놨다. 생명이 아무리 질기다한들 뿌리가 뽑힌 식물이 땡볕의 비닐 위에서 살아남지 못 하리라 기대했다. 아뿔싸! 비닐 위에 놓여 있던 풀들이 비바람에 미끄러져 내려와 흙에다 다시 뿌리를 내린 모양이었다. 아직 비닐 위에 늘어져 있는 쇠비름도 죽지 않고 버티며 기회를 노리고 있는 듯 보였다.

쇠비름이나 선인장 종류는 일반 식물과는 다르게 CAM 광합성 시스템을 갖고 있다고 한다. 광합성은 빛을 에너지로 하기 때문에 낮에 식물의 잎에 있는 숨구멍을 열어 이산화탄소를 받아들여 당을 만들어낸다. CAM 시스템을 갖춘 쇠비름은 일반 식물과는 거꾸로 밤에 숨구멍을 열어 이산화탄소를 받아 놨다가 낮에는 수분을 뺏기지 않으려고 숨구멍을 닫아 놓은 상태로 광합성 활동을 한다. 그뿐만 아니라 잎 표면은 단단한 껍질로 싸여 있고 잎 속에는 점착 물질을 포함한 이중 삼중의 장치로 수분이 달아나는 것을 막고 있다(‘풀들의 전략’, 이나가키 히데히로).

이번 장마는 두려움과 공포 그 자체였다. 밤새 그치지 않고 퍼붓는 빗줄기는 원한 깊었던 사람이 폭발하듯 거칠고 사나웠다. 유독 물에 약한 참깨가 무사할지 또 논이 침수되는 건 아닌지 조마조마 가슴 졸이며 TV를 켜보면 심장이 불규칙하게 벌렁거렸다. 파도가 넘실대는 물 위의 비닐하우스 천장에서 소와 돼지들이 버둥거리고 있었다. 사람을 비롯한 뭇 생명이 죽었고 다 키운 농작물과 농토가 한 무더기 황무지로 변했다. 아비규환의 생지옥이었다.

재난을 관리하며 국민을 안전하게 보호해야 할 대통령은 ‘내가 사고 현장으로 달려간들 상황은 달라질 것이 없다’는 망언에 거침이 없었다. 그 이하 행정자치부 장관이나 지방자치단체장도 똑같은 행태를 보였다. 인간적 도의는 제쳐두더라도 그들이 자주 언급하는 매뉴얼이라도 제대로 지켰어야 했다.

정치 권력자들과 쇠비름의 근성이 많이 닮았다. 그들 얼굴 두껍기가 쇠비름 잎에 못지않고 정치생명을 놓지 않으려고 점액질 같은 탐욕의 장치를 몇 겹으로 싸고 있다. 민심을 거꾸로 읽거나 무수한 눈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영양 성장과 생식 성장을 동시에 하며 끊임없이 영역을 넓혀 가는 체질이 쇠비름의 CAM 시스템과 같다. 뿌리를 뽑아도 죽지 않는 쇠비름과 같은 종자들의 생존 본능을 제지할 수 있는 것은 제초제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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