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칼럼] 물의 온도와 농사의 온도

  • 입력 2023.08.13 18:00
  • 수정 2023.08.13 21:59
  • 기자명 김형표(제주 성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형표(제주 성산)
김형표(제주 성산)

슈퍼 엘니뇨라는 물의 온도의 변화를 이야기한지 3개월이 지났다. 이 물의 온도는 농사의 온도에 영향을 끼치는데 올해는 기습적인 폭우와 산사태 등을 불러일으켜 삶의 온도에 더 영향을 주게 되었다. 통상적으로 ‘장마’는 장마전선이 제주에서 한반도까지 북상하면서 일주일 이상 자주 비가 오는 현상을 지칭하는 말이었는데, 이제는 장마라는 말이 기습적인 폭우 같은 언어로도 쓰일 수 있게 되었다. 자주 오는 비가 아니라 한꺼번에 쏟아지는 비가 장마라는 말에 숨어들게 되었다.

그 기록적인 한반도의 폭우들이 제주에서는 불규칙적인 비로 모습을 달리했다. 맑은 날에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기도 하고, 비가 한번 오면 며칠씩 내리는 날들이 3월부터 7월까지 이어졌다. 볕에 젖은 땅을 내어놓고 말리다 보면 다시 비가 내려 땅이 젖어 들었다. 이렇게 비가 이어지는 환경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나쁜 질병들이 발생해 정상적인 경작이 불가능하다.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지구의 모든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가장 소중한 존재인 물이 농업에서는 조금만 지나치면 독약으로 변하게 된다. 식물들은 80% 이상 건조한 날들이 이어져야만 질병의 위험에서 벗어나게 된다. 가뭄이 풍년이라는 말은 여기에서 기인한다.

이제 내일이면 6호 태풍이 일본의 규슈 지방을 지나 한반도로 북진하게 된다. 제주도에 살면 아주 많은 수의 태풍을 만나게 되는데 이는 남태평양에서 발생한 태풍들이 한반도를 향할 때 제주도를 거쳐 동해로 빠져나가는 태풍의 길이 있기 때문이다. 매년 2~3번씩 태풍을 만나게 되면 그 두렵던 태풍도 한낮 지나간 바람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반면에 한반도에 가장 많은 인구가 거주하는 경기도와 서울에 사는 사람들은 사실상 한 번도 태풍 같은 바람을 만나본 적이 없다. 지난 20여년 간 수도권을 강타한 태풍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반도 내륙을 향하는 이번 태풍은 아마도 우리 사회의 안전과 대비를 한 번 더 실험하게 될 듯하다.

농산물을 생산해 직판을 하다 보면 아주 어려운 문제들과 만나게 된다. 소위 소비자주의라고 불릴 만큼 소비자 정신에 충실한 고객들이다. 그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농산물을 재배하고 수확하고 포장해 발송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에게는 ‘빠름, 빠름’하는 지나간 광고처럼 주문한 농산물이 빠르게 내 집 문 앞으로 도착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아주 많은 쇼핑몰들처럼 배송은 무료여야만 한다. 그래서 밭에서 일하는 도중에 오는 전화들은 주로 택배를 언제 발송했는지, 송장번호는 몇 번인지, 배송된 월동무가 왜 살짝 금이 갔는지와 같은 질문들이다. 소비자들이 농부들에게도 쿠팡이나 마켓컬리만큼의 서비스를 원하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반면에 농장의 현실은 녹록하지 않다. 파종부터 수확까지 자주 일어나는 기상이변과 마주하며 생산에 집중하는 것만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농부들에게 3차 산업을 넘어 6차 산업을 요구하고 있다. 생산하고 가공하고 판매하고 서비스하는 그런 종류의 산업이다. 실제로 소위 6차 산업이라고 불리는 분야로 많은 금액의 농업정책자금이 지원되고 있다. 그러나 생산된 농산물을 소위 ‘식품’으로 가공하기 위해서는 ‘식품가공업 허가’ 즉, 식품공장을 운영해야 한다. 토지와 공장, 시설 등이 식품위생법에 저촉되지 않을 정도로 청결을 유지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렇게 생산된 식품들이 안전한 유통망을 거쳐 고객들에게 전달되는 통로를 만들어야만 한다. 만일 그렇게 생산한 제품이 지금 시대에 어울리지 않고, 품질이 균일하지 않다면 식품사업은 망하게 된다. 여기에 더해 고객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힐링까지 시켜주라는 6차 산업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내 마음속에서는 태풍이 회오리친다.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은 정책을 만드는 학자와 관료들이 어떻게 농산물이 파종되고 재배되어 수확되는지 머릿속에서만 그려봤을 뿐 실제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농부들이 농산물도 생산하고, 가공도 하고, 판매도 하고, 농촌민박집도 운영하면 살림이 좀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이다. 마음의 상처를 입은 도시인들을 맞이하라는 농촌 체험(스테이) 같은 그림들이 그렇다. 그러면 도대체 누가 농사를 지을 것인가? 농사지을 시간에 포장하고, 농사지을 시간에 고객들과 상담하고, 농사지을 시간에 손님들의 음식을 만들다보면 농사지을 농부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나는 까다로운 소비자들에게 자주 대답하곤 한다. “먹을 것들은 직접 재배해 보시면 잘 하실 수 있을 겁니다. 한번 꼭 해보세요.” 제주 농부들은 일 년에 몇 번씩은 태풍을 만나고 이겨내고 농사짓는 사람들이다.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내 마음속의 태풍 하나와 내 마음 밖의 태풍 하나를 이겨내야 하는 일이라 적어본다.

저작권자 © 한국농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