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아들과 딸⑦ 가족 내 여성차별 가해자도 여성이었다

  • 입력 2023.07.23 18:00
  • 수정 2023.07.23 21:0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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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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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되던 해에 아버지가 소를 팔아서 가까스로 입학시켜 준 학교를 ‘어머니 등쌀에’ 몇 달 만에 그만둬야 했다고 토로하는 3남 3녀의 맏딸 김용심 할머니.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딸은 다니던 학교도 억지로 그만두게 했으면서도, 아들에 대한 정성은 더 이상 극진할 수가 없었다. 이 할머니의 바로 아래 남동생의 경우, 국민학교에 취학하기 전부터 서당 훈장을 한문 독선생으로 모셔다가 집에서 조기 교육을 시켰다는데….

-어디 ‘하늘 천’ 자 한 번 써보거라. 흐음, 옳지 됐다. 그럼 ‘땅 지’ 자를 써 봐라. 아이고 이놈아, ‘흙 토’자를 오른쪽에다 붙여놓으면 어떡하자는 것이냐. 이번에는 어디 천자문을 처음부터 한 번 외워 보거라.

-하늘 천, 따 지, 검을 현, 누루 황…검을 현, 누루 황…그, 그다음에 뭣이더라….

-아, 하루 죙일 검을 현 누루 황만 하고 있을 것이여?

그런데 방안에서 흘러나오는 천자문 외는 소리를 부엌에서 듣고 있던 둘째 딸 용례가, 부지깽이로 가마솥 뚜껑을 장단 맞춰 두드리며 낭랑한 목소리로 노래 부르듯 중얼거린다.

-하늘 천, 따 지, 검을 현, 누루 황, 집 우, 집 주, 넓을 홍, 거칠 황, 날 일, 달 월….

“여동생 용례는 참 영특했어요. 부엌에서 쇠죽을 끓이다 보면, 방안에서 훈장하고 남동생이 한문 공부하는 소리가 새 나올 것 아녜요. 그걸 듣고는, 천자문을 즈이 오빠보다 줄줄 더 잘 외워요. 언니인 나도 모르는데 그 애는 천지현황(天地玄黃)이니 우주홍황(宇宙洪荒)이니 하는 말들을, 어머니 들으라고 일부러 그랬는지, 아주 큰 소리로 막 떠들어대요.”

따로 배운 적이 없는데도, 제 오빠가 훈장에게서 배우는 소리를 귀동냥으로 듣고서 천자문의 순서를 척척 외워대는 이 어린 꼬마를 보고 부모들은 뭐라고 했을까?

-입 다물지 못해! 오빠 공부하는데 왜 밖에서 시끄럽게 떠들어, 기집애가!

이건 어머니의 반응이고,

-허허, 참. 쯧쯧쯧. 저 애가 사내로 태어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건 아버지의 한탄이다. 여자아이는 공부를 해서는 안 되는 것은 물론이고, 필요 이상으로 머리가 영특한 것도 환영받지 못할 일이었다.

6.25 전쟁이 터졌다. 밀고 밀리는 공방 끝에 국군이 다시 서울을 수복하게 되고, 김용심 할머니의 강원도 고향에도 일시 평온이 찾아왔다. 이 할머니의 아버지는 마을 이장이었는데, 이장 집 건넌방에서 학교에 가지 못한 동네 문맹자를 대상으로 한 야학이 열렸다. 초빙된 교사가 농사일을 마친 야간에 마을 사람들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물론 남자들만이 모였다. ‘가갸 거겨’ 소리가 밤마다 마당으로 울려 퍼졌다. 김용심이 어머니에게 말했다.

-어머니, 나도 야학 선생님한테서 한글 좀 배우고 싶은데….

-이 밤중에 기집애가 거기 들어가서 뭘 배운다고 또 들썩거리고 나오는 거야! 빗자루 몽뎅이로 얻어맞기 전에 어여 들어가지 못해!

공부를 하겠다는 딸과 기를 쓰고 말리려는 어머니의 가히 운명적인 싸움에서, 지는 쪽은 늘 딸이었다. 어머니는 자기 집 건넌방에서 열었던 야학에마저 딸을 얼씬 못하게 했던 것이다.

“1.4 후퇴 이후 우리 동네가 수복 지구여서 이장 집인 우리 집에서 야학을 열었던 것인데, 그거라도 배웠으면 좋았을 텐데…어머니가 아예 들여다보지도 못하게 해요. 그땐 자기 이름하고 주소하고 그런 걸 써서 신청을 해야 도민증(道民證)을 발급받을 수 있잖아요. 그게 없으면 빨갱이로 몰려서 해를 당하던 시절이니까 여자들도 갖고 다녀야 안심할 수가 있는데….”

김용심 할머니를 비롯한 세 딸은 끝내 초등교육을 받을 기회를 갖지 못했다.

“바로 아래 남동생이 책상에 앉아서 공부하고 있으면 광에 쌀 푸러 오가다가 이건 무슨 글자냐, 아무 글자는 어떻게 쓰냐, 물어보면 잘 가르쳐 줬어요. 한글을 그렇게 서럽게 배웠어요. 남동생 3형제 중에서 바로 아래 동생은 대학에 진학했다가 중퇴했고, 둘째 남동생은 대학을 졸업했고, 셋째 아들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지금(2002년) 소령으로 복무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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