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6월의 논두렁에서

  • 입력 2023.07.09 18:00
  • 수정 2023.07.09 18:10
  • 기자명 정성숙(전남 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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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숙(전남 진도)
정성숙(전남 진도)

부실한 보리타작을 마치고 모내기하기까지의 과정은 실로 어떤 작전을 치른 것 같다.

보리타작하는 클라스 콤바인이 맨 마지막 논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나는 반대편 논에서 보릿대를 태우기 시작했다. 좋은 유기물을 태우는 것이 아깝지만 보릿대가 무더기로 둥둥 떠다니면서 심어놓은 어린모를 덮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보릿대를 태우면서 논두렁에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풀을 한 번 베는 효과가 있긴 하다. 바람 방향을 맞춰 보릿대에 불을 붙여 놓으면 바람이 알아서 보릿대를 태워준다. 보릿대를 태우면서 논 물꼬도 막았다.

보릿대가 얼추 태워졌다 싶으면 논에 물을 넣기 시작하면서 농업기술센터로 볍씨 소독을 하러 갔다. 소독을 마친 볍씨를 물에 담그고 발아기를 켠 후 24시간 침종하는 동안 파종 준비를 한다. 모종을 키울 비닐하우스 앞에 모판 상자를 꺼내 놓고 파종기를 설치하는데 보리를 건조 중인 건조기에서 삐이익! 삑! 경고음이 울렸다. 남편과 나는 부리나케 건조기가 돌고 있던 창고로 뛰어갔다. 비가 개자마자 급하게 보리타작을 했기 때문에 건조기에 보리를 넣은 후에는 일정 시간 순환을 한 다음에 건조해야 하는데 수분을 머금고 있는 보리를 곧바로 건조를 시작한 게 문제라고 남편을 타박했다. 바쁜데 언제 그러고 있냐고 남편은 더럭 짜증이다. 바쁜데 문제가 생겨서 더 번거롭게 되지 않았냐고 내가 한마디 보태면서 열기를 내뿜고 있는 건조기보다 뜨거운 증기가 우리 주변에서 맴돌았다.

품앗이로 볍씨 파종을 마치고 나면 남편은 트랙터를 끌고 논으로 달린다. 파종 후 열흘 후에는 모내기를 하기 때문에 논 로터리를 2회 치고 써레질까지의 일정이 빠듯하다. 나는 나대로 모종에 물을 주고 비닐하우스 개폐기를 아침에는 열어두었다가 오후에는 닫아서 모종이 열에 뜨지 않도록 관리를 한다. 참깨밭에서 풀을 뽑고 있는데 남편이 전화를 했다. 논에 물이 너무 많이 들어간다고 물꼬를 닫으란다. 어이가 없어서 화도 나지 않았다. 논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이 논 물꼬 단속을 해야 하거늘 밭에 있는 나를 굳이 부른 것이다. 그만큼 본인이 하는 일은 중하고 급하다는 것이고 내가 하는 일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보조자로 규정짓는 일상적인 인식이 이렇게 돌출된다.

식당에 주문했던 국밥을 논으로 갖고 가서 남편과 대충 한 끼를 때우고 다시 참깨밭으로 와서 풀을 뽑는데 그립지 않은 남편이 또 전화를 했다. 트랙터에 기름이 떨어졌다고 기름을 가져오란다. 트럭에 기름통을 싣고 농로에 먼지를 일으키며 논으로 달렸다. 모내기를 시작하기 전에 꼭 마무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내 일감들, 참깨밭의 풀과 참깨밭으로 넘어오고 있는 칡덩굴 없애기 그리고 포트에서 늙고 있는 옥수수 모종 심기는 계속 줄지 않고 남편의 조바심에 부응하느라 뛰어다니다가 하루가 다 간 것 같다.

모내기할 때는 몇 분 몇 초를 다투며 몸을 움직여야 한다. 남편은 이앙기를 몰고 남자 한 명이 이앙기 뒤에 타고 모종을 넣어주면 일의 진척이 빠르다. 남자 두 명은 모종을 나르고 여자 한 명은 빈 모판을 정리하면서 재빠르게 비료를 이앙기에 올려줘야 한다. 15~20kg의 비료가 여성에게는 너무 버겁다. 비료가 10kg이라면 좋겠다.

이런 내 모습(여성농민)을 어느 학자가 객관적으로 진단한 부분이 눈에 띄었다.

〈벼농사 체제에서 여성은 핵심적인 인적 자본이었다. 가구 단위에서는 높은 노동력 재생산과 육아를 책임졌고… 수많은 두레와 품앗이, 마을 잔치의 음식과 뒷정리를 감당했다. 여성 없이는 굴러갈 수 없는 체제였음에도 불구하고 마을 단위 의사 결정 구조에서 여성을 배제했을뿐더러… ‘쌀 재난 국가’ : 한국인은 어떻게 불평등해졌는가, 이철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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