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너희들은 돼지야"

  • 입력 2023.07.09 18:00
  • 수정 2023.07.13 15:43
  • 기자명 김수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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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김수나 기자]
 

한 여자가 남편과 두 아들, 세 사람을 업고 서 있다. 업힌 세 사람은 웃고 있지만, 업은 여자는 등이 굽은 채 굳은 표정이다. 집에 아이가 있다면 한 번쯤은 봤을 그림책, <돼지책>의 표지 그림이다. 이 책에서 집안일은 전적으로 아내이자 엄마인 피곳 부인 몫이다. 멋진 집과 차를 가진 남편, 두 아들은 끊임없이 피곳 부인에게 “빨리 밥 줘”만 외치며 집안일엔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이들에게 피곳 부인은 목소리를 지닌 존재가 아니라 자신들의 뒤치다꺼리를 해주는 대상일 뿐이다. 결국 어느 날 피곳 부인은 “너희들은 돼지야”라는 쪽지를 남기고 ‘집구석’을 나가버렸다. 멋진 집은 곧 더러워졌고, 남편과 두 아들도 돼지로 변해간다. 물론 결말은 해피엔딩이다. 피곳 부인은 돌아와 자기 삶을 찾고, 집안일은 가족 모두가 함께 맡는다.

<돼지책>은 동심을 위해 훈훈한 결말을 냈을지 모르나 현실은 간단하지 않다. 지금 한국에선 농민이 피곳 부인의 처지가 아닐까? 국민 96%를 4%의 농민이 업고 있는 상황, 거칠게 계산하면 농민 1명당 24명을 업고 있는 셈이다. 농산물 시장을 외국에 내준 대가로 얻은 이익은 기업과 도시로 몰리고 피해는 고스란히 농민이 감당했으니 말이다. 그것도 모자라 물가폭등 시대에 이른 지금 애꿎은 농산물만 물가상승 주범으로 내몰리고 있다. 농민 등허리에 짐만 자꾸 더하는 사회, 농민들이 지금껏 감당해온 그 무게에서 자유로울 구성원은 단언컨대 없다.

농업문제의 근본을 물어야 할 언론조차 농민의 목소리엔 관심이 없어 보인다. 농업문제는 정쟁의 수단이 되거나, 먹거리 문제로만 좁혀진다. 농민의 실제 삶은 어떤지 묻지 않는다. 농민은 대상화되고, 언론 보도는 농민의 현실과 거리가 점점 더 먼 내용으로 채워진다. 현장에서 만난 농민들이 곧잘 하는 말, “끊임없이 외쳐도 언론에 단 한 줄 나가지 않는다”, “농민 말은 안 믿는다”. 이대로라면 현실은 <돼지책>처럼 해피엔딩이 되긴 어렵겠다. (사족 : 돼지는 잘못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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