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정춘추] 투명인간에서 시민으로

  • 입력 2023.06.25 18:00
  • 수정 2023.06.26 06:26
  • 기자명 김정섭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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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섭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김정섭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소설《투명인간》에서 주인공은 몸이 투명해지는 약물을 발명하지만, 투명하기 때문에 타인과의 관계가 단절된다. 결국은 미쳐서 살인을 저지르다가 처단당하는 것으로 소설이 끝난다.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면 살 수 없고, 인정받으려면 남들이 나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가시성은 생존의 필요조건이다. 투명해서 존재감을 인정받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농민도 그중 한 부류다. 국민의 절반이 농촌에 살던 수십 년 전과는 달리 농민은 소수 집단이 됐으니, 농사짓는 삶과 농촌 살이에 대한 이해(理解)와 심정적 지지가 줄어든 당연한 결과라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농민의 존재감 상실을 자연화(自然化)할 수는 없다. 사회의 변화는, 자연스러운 듯한 어떤 사회 현상이 사실은 자연스럽지 않음을 아는 데서 시작된다.

농가 경제의 불안정이라는 ‘경제 위기’ 그리고 자연생태계와 사회체계 사이에서 균형자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 산업화된 농업으로 표상되는 ‘환경 위기’와 더불어, 농업·농촌의 삼중 위기 중 하나인 ‘사회 위기’는 전체 사회와 농촌 사회의 거리가 멀어진 것에서 온다. 그렇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도시화와 결부된 세대 효과에 있다. 산업화와 더불어 1970년대부터 수십 년 이촌향도(移村向都)의 흐름이 계속됐다. 원래 대도시보다 대도시가 아닌 지역에서 출생아 수가 훨씬 더 많았는데, 1990년대 들어서면서는 거의 같아졌다. 현재 삼십대 초반 나이인 1991년 출생자는 약 71만명이다. 그 가운데 특광역시 출생자가 거의 절반이다. 꼭 그런 건 아니겠지만, 유년기부터의 성장 과정 중에 어디에서 살았는가에 따라서 농업이나 농촌에 연관된 심상(心想)이 달리 형성돼 작용할 확률이 높다.

예나 지금이나, 군대에 가면 밥 먹기 전에 복창한다. “감사히 먹겠습니다!”라고. 똑같이 식사 전에 감사의 마음을 떠올린다고 해도, 개인의 경험에 따라 그 심정(心情)의 밀도에 차이가 있으리라는 것쯤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시골 농가 출신으로 중학생 때 경운기 운전을 배우고, 농사일을 거들고, 산에서 ‘나무를 해 오는’ 것이 의무로 부여된 일과를 경험하며 성장한 사십 년 전 육군 상병 김 아무개와 요즘의 서울 출신 육군 일병 박 아무개가 “감사히 먹겠습니다”라고 복창할 때, 그 ‘감사하는 마음’들의 디테일과 강도(剛度)가 같을 리 없다. 아는 만큼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온 국민의 먹거리를 책임지고 고단하게 농사짓는 농심에 제대로 공감하지 못한다’며 서울 출신 박 일병을 나무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 ‘농촌-인지 감수성’ 차이는 개인이 선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편, 도시와 농촌 사이의 사회문화적 이격(離隔)을 ‘세대 효과’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농민의 가시성을 억누르는 여러 시스템이 있다. 예를 들어 보자. 언젠가부터 똑같은 외양의 제품들을 정면에 놓은 진열대가 대형 매장의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먹거리도 예외가 아니다. 그리하여 먹거리가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그 기원이 은폐된다. 농민 등 일차 생산자는 익명적이고 교체 가능한 상태에 놓인다. 위해요소중점관리제도(HACCP)의 기준을 충족하는 한, 미나리, 토마토, 아스파라거스, 우유, 사과 따위를 누가 어떻게 생산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렇게 현 상황은 어렵지만, 이를 바꾸려는 노력이 줄기차게 이어져 왔다. 얼굴 있는 먹거리를 나누는 실천, 농·산촌 유학, 청년에게 농촌에서 진로를 탐색할 것을 권하는 각종 ‘살아보기’의 초대, 더욱 다양하게 펼쳐질 관계인구 늘리기 등 도시와 농촌의 사회문화적 거리를 좁히려는 노력이 펼쳐지고 있다. 더욱 참신하게 그리고 더욱 확장된 스케일로, 그리고 농민이 주도하는 가운데 그 노력이 계속돼야 한다. 농민을 투명인간으로 만드는 힘에 저항하는 바로 그만큼 바로 그 자리에서, 그런 실천은 결국 사회통합에 긍정적으로 기여할 것이다. 그 같은 기여에 대한 사회적 인정을 요구함으로써, 농민은 상징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시민’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다시 설정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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